우리의 모습 1994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개발독재의 마지막 작품이다.
10.26 15주기 기념식은
개발독재 잔당들이
무너져도 죽지 않음을 보여준
불사조의 궐기장이었다.
군사문화는
KAL기를 제주 풀밭에 밀어붙여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다른 아무 말이 필요 없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한동안 한반도를 긴장시켰던 핵문제도
모양은 우습지만 해결되고
경제적 교류가 정치적 통일의 전제라는 이론무장과
경제협력이라는 미명하에
단순노동 착취에 온갖 회사가 진출하기 시작하고
선점의 효를 누리기 위해 뇌물로 이권을 산다.
북한은 노동력의 공급과 상품의 시장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경제협력이라는 민족제국주의다.
통일비용이란 총체적 동질화에 수반되는 비용이다.
단순노동자는 실업과 실질임금 하락을 겪을 것이고
이른바 중산층은 조세부담 증가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도 부담하지 않는다.
정부도 민족애로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차에 치인 여인은 죽어가는데,
그 여인의 가방에서 흩어지는 돈을 줍겠다고 난리가 나서
아무도 달아나는 차번호를 못보았다.
전철에서 걸인이 찬송을 부르며 구걸할 때
정말 장애자인지 의심하고
사회단체에서 모금하면
횡령을 걱정해서 못내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종교단체의 신도수는 총국민수를 능가하고
아들의 대학합격을 위해서는 절과 교회
성당을 하루에 돌며 빌어도
양로원과 고아원은 더 춥고 더 배고프고 더 외로워진다.
간디가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싫어한다.
크리스찬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기 때문이다”
조계종과 조직폭력배의 관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림은 씨와 밭의 비유를 대며
아직도 동성동본금혼의 금과옥조를 말한다.
종교와 윤리와 인간성은 과연 분리되어야 옳은 것인가.
스스로 모질기 위해
연습으로 살인을 하고
심판의 여신처럼 눈가리고
아무나 잡아
죽이고, 자르고, 태워버렸다.
무섭다.
그러나,
무전유죄의 희생양이란다.
인면수심은 다시 양가죽을 쓰는구나.
남녀의 출생 성비가 벌어지고 있다.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불태워도
우리 아들은 그럴 리 없다.
이렇게 키운 아들이 혼수 적다고 폭력배가 된다.
그래도 맞는 딸보다 때리는 아들이 낫다는 것일까.
제왕절개를 몇 번씩 해도 아들을 낳겠다.
아들이 아니면 태아살해도 좋다. 내가 칼을 잡지 않으니.
유아수출국의 오명도 나와는 무관하다.
남의 애를 어떻게 키워?
살모사래도 내 아들이 최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파키스탄 농부의 기사가 떠오른다.
오른쪽 팔이 손목위까지 잘리운 농부.
그에게 남은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
한국에 대한 증오뿐.
還鄕女와 貞身隊의 역사도
기생파티의 조국재건도
중동근로자와 춤바람의 애환도
이제는 모두 끝. 당한 대로 한풀이하자.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뒷산의 밤나무는 떡메를 맞아
밤송이를 떨구어야 하고
사람에게 먹이를 빼앗긴 산짐승은
배고픈 겨울을 난다.
음주운전 단속을 피하는 방법을 술마시며 설명하고
건배하며 열심히 듣고 배운다.
!? 아뿔싸, 걸렸구나. 얼마를 먹여야 하나.
면죄부 값을 흥정한다. 그리고는
공무원이 썩었음을 욕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자
추한 나의 모습을 부정하지 말자
부끄러워하자
그래야만 인간이 된다.
인간속에서만 인간은 살 수 있다.
1994년은 절망이었다.
지독히도 무덥고 가물었던 여름
그러나 시월이 가기 전에 바람이 차고
마음은 벌써 두려움에 이미 떨고 있다.
올해 겨울은 춥고 길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