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8일 목요일

순수의 위험성 (초고)

 순수의 위험성

 

단순, 간단, 명료, 순수는 그 자체로 좋고 아름다운 것이며, 진리의 중요한 속성으로 믿어진다. 이는 어떤 문화, 학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기에 가장 보편적인 믿음도 위험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정리(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 기하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있고, 대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대수학적인 증명이 훨씬 쉽다. 피타고라스는 순수하게 기하학만으로 증명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하학을 대수학보다 더 순수, 그래서 우월하다고 봤다. 좌표 시스템이 대수학에 도입되면서 기하학은 사실상 소멸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있어서 수학은 일종의 종교였다. 수학이 천지창조와 우주작동의 근본원리라 생각했다. (종교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이 점만으로도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의 섭리를 찾기 위하여 온갖 수학적 탐구를 하였다.

 

미적분과 통계학

미적분에는 무한대와 수렴의 개념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수학의 다른 영역에 비해 미적분이 실용성이 가장 높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무한대와 수렴은 절대적이나, 대학 수준 미적분에서는 어느 정도 큰 수는 무한대로, 충분히 접근하는 경우에는 수렴으로 간주한다.

통계학은 미적분에 기초한다. 표본의 수가 무한대이면 모든 분포는 정규분포로 유도된다. 현실 통계학에서는 표본의 수가 30을 넘으면 정규분포를 적용한다. 이는 30을 무한대로 간주한 결과이다.

간주는 피타고라스가 봤다면 절대 용납하지 못 할 일종의 더러운 폭력이다. 수학은 피타고라스 쪽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울지 모르나, 미적분과 통계학의 유용성은 사실 이런 간주즉 더러운 폭력의 결과이다.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

톨레미의 천동설에 의한 천문도는 매우 복잡하다. 행성은 안정된 타원 궤도를 그리지 않고 좌우로 움직인다 (그래서 행성 planet은 어원적으로 방랑자라는 뜻).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하면 천문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간단해진다. 질량을 지닌 행성이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있을 수 없으므로 지동설이 맞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에 앞서 천문도가 훨씬 간단해진 것 만으로도 지동설의 우위는 분명하다.

이후 지동설이나 뉴튼 물리학으로 설명되지 않은 이상한 혹은 예외적인 지저분한현상들이 발견되었고, 이는 다시 아인시타인 등에 의해 청소되어 좀 더 간단(순수)해졌다. 뉴튼의 물리학이나 아인시타인의 물리학이나 다 맞고, 우열이 없다. 양자는 적용이 필요한 상황이 다를 뿐이다. 억지로 비유를 하자면, 현미경 쓸 때와 망원경을 쓸 때가 다를 뿐이다.

 

종교에서의 순수성

그리스 로마의 범신론, 힌두교 등 만신론 대비, 유일신교의 교리가 더 간단하다. 유일신교 가운데에서도 예수처럼 반인반신(demigod)의 존재가 있는 종교도 있고, 없거나 이를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반인반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대교나 무슬림의 교리가 논리적으로는 더 간단하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신과 예수의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고, 간단히 말하면 그게 교부철학이다. “힌두교화되기 전 불교는 심지어 유일신의 존재도 없었고, 그런 점에서는 무신교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논리적으로는 가장 간단하고 깔끔하다. 설명할 유일신이나 반인반신 존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 예수, 마호멧 공히 천국의 존재 자체는 언급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천국에 관한 수많은 질문에 전혀 답하지 않았다. 이들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의 결과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더 많은 질문. 어떠한 답도 더 많고, 더 난해하고, 더 무의미한 질문을 만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제일, 그리고 유일하게 깔끔한 상황은 질문도 없고 답도 없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우주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완전한 무가 정답이지만, 질문자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신앙과 윤리

종교에서 신앙과 윤리는 별개이다. 신앙은 신의 섭리이며, 윤리는 인간의 (더 정확히는 사회의) 약속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신앙은 윤리에 우선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그 결말이나 해석은 최소한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아들이 윤리를, 제물이 신앙을 의미하며, 종교에서는 신앙과 윤리는 별개이며 신앙이 우선한다는 것이 여기서의 요점이다.

 

무슬림과 이슬람

정치화된 무슬림을 이슬람이라 한다. 무슬림은 신앙 그 자체와 개인적 신앙을 의미하며, 신정국가, 정교분리나 세속주의 부정, 종교지도자의 정치 관여 등의 상황이 있으면 이는 곧 이슬람이다. 이슬람을 이렇게 정의하면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샤리아 율법이 법이다. 역으로 샤리아 율법이 법이거나 심지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윤리일 경우 그 사회는 이슬람이다.

앞서 종교에서 신앙과 윤리는 별개라고 하였으나, 이를 부정하고, 윤리 즉 법(“법은 최소한의 윤리라는 면에서)을 신앙에 복속시키거나, 아예 율법 이외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 이슬람이다.

 

세상은 더럽다

세상 즉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더럽다”. 이는 자명하거나, 주위를 한번만 둘러보거나, 언론 보도 몇 줄을 보더라도 분명하기에 설명이 필요치 않다.

세상이 순수하다면, 다른 말로 이상적이라면, 이는 정의에 의해 천국이다. 세상이 천국이라는 것은 자명한 모순이다.

역사는 현실의 누적이다. 따라서 역사도 더럽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진보한다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정한 역사의 방향이 있고, 역사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또한 그 방향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 , 그들은 역사의 방향은 그들 편이라고 주장한다. 방향성이 있어야 진보가 존재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역사는 우리 방향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진보한다그리고 역사는 진보한다, 우리는 그 방향에 있다두 말은 각각 그 자체로 동어반복이며 순서만 바꾼 같은 말이다.

한편, 역사는 (항상) 퇴보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플라톤이 그 원조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시작에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고, 이후의 모든 변화는 그 이상향에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에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대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순전히 철학적인 사고도 세상은 더럽다는 명제를 부정하지는 못 한다.

플라톤 수준은 아니더라도, 변화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보수주의는 변화를 부정적으로, 진보주의는 긍정적으로 본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이것이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순수한 행동

더러운 세상을 청소, 즉 이상화하려는 노력은 항상 있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고,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나 세상을 청소하겠다는 행동주의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순수 즉 이상의 눈으로는 어떤 것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이상의 눈으로 평가하고, 선악의 가치관을 적용하여 어떤 것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노력이라 해도 이념화된 행동이 된다.

순수한 행동은 이념화되면 위험하다. 존재하는 것들의 더러운 역사와 그것이 현존하는 더러운 현실을 무시하면 그러한 행동은 이념화된 행동이다.

 

역사는 더럽다

앞서 언급한 더러운 세상을 청소하려는 순수한 행동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역사를 다림질 하려는 시도도 많다. 이는 더러운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이며, 이에 더해 역사는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역사는 현실의 누적이고, 현실 자체가 더러운 세상이기에 역사도 더러울 수 밖에 없다.

역사 바로잡기나 수정주의는 이념화된 세계관이다. 역사의 궤적은 사이먼(Herbert A. Simon)[1]이 말한 대로 무작위적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과 반혁명 과정, 과거 소련과 오늘날 정반대의 러시아를 보거나, 중국의 최근 대약진운동의 재등장을 보면 역사의 굴곡은 바로잡기에는 너무 많다. 바로잡기 자체도 가능성을 떠나 매우 위험하고 오만한 시도이다.

 

혁명과 진화 (revolution & evolution)

사전적으로 혁명의 반대말은 진화이다. 또한 사전에 evolution“1. 진화”, “2. (점진적인) 발전[진전]”[2]이다. 이 글에서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혁명의 반대말의 의미이다.

앞서의 순수한 행동이 혁명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경우가 공산주의이다.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정의로는 충분하지만, 기존체제(ancien régime) 타도가 그 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헤겔의 역사관,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가치관, 레닌의 실행이 그 맥락이다. , 프랑스 혁명은 현실의 모순에서, 러시아 혁명은 이념화된 가치관에서 출발하였다. 그 결과나 의미는 역사책 한두 권 보면 충분할 것이다.

모든 혁명은 실패했다. 소련이든 쿠바든 한 때 성공한 것으로 보였던 모든 혁명은 결국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좋게 말해, 실험이었다.

동일한 문제의식과 동일한 결과를 갖더라도, 그 과정이 점진적인, 즉 진화의 경우, 폭력도 없거나 적었고, 결과는 유지되었다. 많은 예외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아니라 진화가 사회변화에 더 효과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탈레반, 원리주의, 근본주의

이들의 공통점은 이상을 현실에 강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 모두 그들의 주장과 행동에 모순이 많지만, 일단 주장하는 바를 다 인정하고, 개념적으로만 볼 때 그렇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그들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하려는 재세이화(在世理化) 태도는 있었다. 이는 그들의 사명이자 의무이다. 문제는 더러운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더러운 현실을 수용할 수 없는 순수는 무책임한 실험 일뿐이다.

 

순수한 세뇌

안타깝게도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세뇌에 약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어린이에 대한 세뇌는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위험하며, 가장 혐오스럽다. 한마디로 순수에 대한 순수한 세뇌가 가장 위험하다.

영국 철학자 러셀은 부모가 그들의 어린 자식에게 종교를 이식하는 것을 문제시 했다. 이는 모든 사상(종교 포함)에서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는 문화의 정의라 할 수도 있다. 피할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문제이지만 몇 가지 예로 그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슬람 경우, 마드라사에서 어린이에게 무슬림 및 샤리아 교육, 불교 등 경우, 사원이 고아원 혹은 유치원 역할을 하면서 어린이가 불교에 젖게 하는 교육, 어린이에 대한 소련의 소비에트 교육과 중공의 국수주의 교육.

어떤 것이 세뇌이고, 어떤 것이 교육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렵고, 그것이 문제이다.

 

더러운 순수

순수가 진리에 부합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문화, 종교, 학문에서도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다. 반면 세계는 더럽고, 그를 모르거나 부정한다면, 순수는 근본주의가 되어 극단적인 행태를 가질 수 있다. 순수한 이상과 더러운 세상을 동시에, 그리고 같은 수준으로 이해해야만 개인이든 사회든 건강할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이든) 발전할 수 있다.

 

2021.10.29

최원영



[1] https://en.wikipedia.org/wiki/Herbert_A._Simon

[2] 옥스퍼드 영한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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