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방향성
역사는 방향성을 갖고 있고, 자신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상대방은 다른, 즉,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주장은 국제정치에서 흔히 보는 주장이다.
시진핑은 서구 중심의 역사는 끝났으며 중공이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1945년 마오쩌둥,
1981년 덩샤오핑 이후 세번째의 “역사결의”를
한다고 한다.[1] 집권자가
자신의 역사를 정의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에는 분명 중공이, 심지어
본인이, 새로운 그리고 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주장이 있을 것이다.
헤겔은 역사는 끊임없이 전진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그 전진은 세계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소련의 등장으로 세계는 양극체제, 그
붕괴로 단극체제가 되었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 과정으로 역사가 전진한다고 하였는데, 소련의 붕괴로 정반 중 하나가 없어졌으니 합도 있을 수 없고, 역사의
전진(합)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Francis Fukuyama 1992,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기본 모티브이다.
중공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역사의 퇴보로 보이는 현상들이 너무 많아, 개인적으로
좌절과 실망을 많이 느낀다. 역사에 방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든다. 생물학에서 이에 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시간과
변화가 존재하면 곧 역사라는 의미에서, 물리학도 매우 넓은 의미의 역사성이 있을 수 있고, 생물학은 그 자체가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봐도 생물학의
역사에서는 찰라 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을 인류 역사에 참고하는 데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단위)의 차이를 주의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종교와는 근본적인 부조화가 있음을 인정하며, 그에
대한 어떠한 견해에 대해서도 중립적임을 미리 밝힌다.
史庫로서의 유전자
인간 유전자(게놈)의 1-2%만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2] 나머지는
비활성이다. 비활성 유전자의 일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간접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도 안 한다. 척추동물 같은 고등동물뿐만 아니라 박테리아처럼 단세포 생물에서도 대부분의 유전자는
비활성이다. 왜 이렇게 많은 유전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생물체는 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을까? 활성 유전자는 현재 생물체를 만들고, 재생하기 위해 사용되는 청사진이자
스냅샷이고, 비활성 유전자는 현재 생물체의 계통발생(단세포에서
현재 종까지의 진화) 과정의 기록을 저장하고 있는 저장소(史庫)라 생각한다. 개체발생(수정란에서
출생까지)의 과정에서는 계통발생 과정에서 소멸된 일부 기관이 일시적이라도 발현한다. 유전자의 역할, 비활성 유전자의 존재, 개체발생 과정에서 임시 기관의 발현에 필요한 “정보”의 필요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비활성 유전자가 계통발생의 “정보” 즉 “역사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史庫, archive)라는 것이 (최소한 개인적) 결론이다.
유전자의 방향성
고래는 육상동물이었지만 바다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아가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는 고래뿐만 아니라 모든 파충류 이상 수생동물의 공통점이다.
고래가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아가미가 더 “효율”적이었다면
아가미가 다시 나타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경우와 달리 고래가 유일하게 전 생애를 바다에서
보내는 포유류이다. 새끼가 태어날 경우 호흡을 위해 어미가 새끼를 물 밖으로 업듯이 해서 노출시킨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이 불가피한대도 허파로 공기 호흡을 하는 이유는 산소 획득에 허파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고래는 수중생활에 적응하여 음파로 (그러나 공기를 매체로 하지 않는
다른 방식) 통신한다. 물속에서는 다른 수단이 효과가 없다. 전파도 물속에서는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잠수함도 음파(소나)를 사용한다.
요약하자면, 생물에 있어서 환경이 급변하거나 경쟁이 극심해져서 존립에
위협을 받는 환경에서는 모종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생물은 1)비활성 유전자에서 쓸만한 참조를 찾아내거나, 2)아예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중 적합한 변화를 찾아낸 개체가
생존하고, 번성해서 새로운 형질로 이어진다. 두 경우의 변화는 공히 주어진 환경에서 효율적이어야 한다. (두 경우 공히, 특히 1) 경우, 내가
배운 한에서는 맞고, 이 글의 논지이지만, 확립된 이론인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근거를 찾지도 않았다.)
생물학에 있어서 역사의 방향성은 표면적으로, 그리고 현생 생물의 경우에
있어서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으로 고래). 그러나
이런 방향성은 비활성 유전자, 즉 史庫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론
논리전개 상 일차적인 결론은 史庫가 존재해야 역사의 방향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생물체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동물의
경우 특정 기관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런 기관을 찾아내려 노력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결론은, 그런 기관은 없고, 세포
단위에서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모든 세포에 있다. 시간을
세포 단위에서 인식하는 것처럼, 史庫도 모든 세포에 있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다른 史庫, 즉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이는 정의에 의해 癌이다. 참고로 癌의 정의는 “이상 세포의 통제불가 증식 (uncontrolled growth of abnormal cells)”이다.)
나의 두 번째 결론은, 史庫는 모든 세포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생물체를 맞비교하는 것(의미는 다르지만 나치가 한 짓)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다만, 특정
위치에 단단히 잠긴 채로 있는 史庫는 최소한 역사의 방향성에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2021.10.21
최원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