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발다이 포럼 연설
우연히 이 연설에 대해 듣기 전까지 푸틴에 대한 나의 인상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리트비넨코 “방사능 홍차” 독살 그리고 정적 나발리에 대한 집요한 탄압, KGB 걸음걸이 (오른팔은 총을 뽑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왼팔만 흔드는), 마초 이미지, 옐친과의 기괴한 정권이양 정도였다.
이 연설의 개략을 듣고, 그 내용에 흥미가 생겨 영문판 전문을 읽어보았다. 나중에 이 연설의 내용에 관해 나름 생각한 점을 별도로 쓸지도 모르겠으나, 이
글은 연설문 및 연설가에 한정하여 느낀 점을 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용에 대해 일정한 언급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연설의 출처는 크램린궁 공식 사이트(http://en.kremlin.ru/events/president/news/66975)이다. 연설은 2021.10.21 21:25에 소치 발다이 (Sochi, Valdai) 에서 했다.
청중은 대학교수, 연구소 연구원, 언론인, 외교관이나 국제관계 전문가들이다. 푸틴은 37분간 프롬프터 없이 연설했다. 원고는 있었으나, 일부는 메모 형태, 일부는 원고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상당히 긴 연설이나 상당 시간 원고를 곁눈질로 메모 참조 정도만 하면서 고개를 들고 연설했고, 일부는 원고를 보면서 하거나, 끝부분에서는 읽기도 하였다. 청중과 눈맞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청중의 성격상 정치인의 연설이라기
보다는 학회 기조연설 같은 느낌이었다. 푸틴은 국가정상들이 보통 그러하듯 자국어인 러시아어로 연설했으며, 영어로 동시통역되었다. 동시통역 내용과 크램린 공식 사이트에 게시된
내용은 약간 다르다. 이는 푸틴의 연설이 사전에 조율된 원고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정상의 연설은 대부분 전문가 참모가 작성한다. 푸틴은 마틴 루터
킹 연설을 인용하면서, 그 부분을 자신이 직접 넣도록 했다고 말했다.
역으로, 연설을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굳이 이런 식으로 밝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이라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 작성자가 누구이든 매우 잘 쓴 글이다. 연설문 참모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작가라기 보다는 작가 소질이
있는 전략 참모이며, 다른 참모 대비 영향력도 크다. 푸틴의
참모는 푸틴의 정책이나 생각을 잘 이해하는 참모이겠지만, 이 글은 그 구성이나 표현이 마치 푸틴이 직접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연설 이후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이는
오롯이 푸틴 혼자 대응했다. 질의응답에서 푸틴의 논리전개는 마치 군사작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전략적이었다.
화법에 있어서 영어권에서는 ‘you’를 많이 쓰라고 한다. 이는 3인칭보다는 가급적 2인칭을
사용하여 청중과의 거리를 줄이려는 것이다. 푸틴은 이를 넘어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식의 표현을 써서 공감을 잘 유도하였다. 몰론
이는 푸틴 본인이 자신과 여러 이슈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인식을 알고 있고, 공감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러기에 ‘너도 알고 나도 안다’라는 말이 공감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화든 연설이든 그 목적은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푸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만든 웃통 벗고 말 타는 마초 이미지로 ‘근육의 힘’을 일차적으로 연상할 것이다. 또한 그가 미국과의 대결이나, 반대파 혹은 적대적 언론과의 관계
등으로 그의 ‘의지의 힘’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번 연설은 내용 자체나, 연설자로서 그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이나, 질의응답에서 보여준 지적 능력으로 ‘두뇌의 힘’도 충분히 보여줬다는 생각이다. 특히 역사와 문화,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논쟁의 강력한 무기였다.
질의응답에서는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도 상당히 가시 돋친 질문을 했으나, 푸틴은 오히려 이 질문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노벨상
수상에 대한 축하도 빠뜨리지 않았다. 언론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진심 어린 축하였다. 이 점은 푸틴에 대한 고정관념을 상당히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정치인에게 연설은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푸틴은 KGB 출신이다. 정보기관과 연설은 뭔가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한다. 그의 다른 연설은 본 적이 없지만, 청중이 일반대중일 경우 보통
보는 정치인과 같은 연설도 평균 이상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설은 학자들을 상대한 것으로 선동이
아니라 논리가 우선되는 것이었다.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을 상대로 공감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강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브레인 파워에 있어서는 현존 어떤 국가원수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시진핑의 궤변[1]도
없고, 바이든의 우왕좌왕도 없고, 일본은 언급할 지도자도
없고, 메르켈은 은퇴했고, 마크롱은 아직 체급이 안 될 것
같다.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가원수의 개인적 능력이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겠으나, 굳이 예를 들자면, 정상회담에서는 분명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겸손은 항상 미덕이지만, 푸틴 앞에서의 오만은 (배석자가 없다면) 상당한 자괴감으로 결과될 것이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21.10.26
최원영
[1] https://www.scmp.com/news/china/politics/article/3152389/xi-jinping-says-chinas-democratic-political-system-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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