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항공기 엔진

 항공기 엔진

 

최근 한국산 본격 전투기 KF-21 개발 관련 보도도 많이 나오고, 그 엔진까지 자체 개발중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아는 한 정리했다.

 

항공기용 엔진의 종류

피스톤 엔진

그림 1 사이클론 엔진

과거 쓰이던 피스톤 엔진이다. 현대에는 자동차 엔진처럼 생긴 엔진을 보통 사용한다. 사진의 엔진은 9개의 실린더가 한 개의 크랭크 축에 연결되어 있다. 크랭크 축이 나타난 사진을 보면 30년대 기술이지만 아주 참신한 아이디어이다. 사진 오른쪽은 프로펠러인데, 피치 조절이 안 되는 것 같다. 현대의 프로펠러는 아래 터보프롭의 경우처럼 프로펠러의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하의 모든 엔진은 터빈 엔진이다. 왕복 운동하는 피스톤과 실린더가 없다. 터빈 엔진은 구성을 아주 간단히 말하면, 공기 압축 연소 터빈 회전 등 3단계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이는 모든 터빈 엔진에서 같다.

 

가스 터빈 엔진

가스 터빈 엔진은 항공기용은 아니지만, 가장 간단한 터빈 엔진이라 이하 다른 터빈 엔진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림 2 가스 터빈 M1A1 탱크 (brainstudy.info)

아마도 가스 터빈 엔진을 사용하는 탱크는 미국의 M1A1이 유일할 것이다. 연비는 아주 나쁘지만, 체적대비 출력이 워낙 좋아 채용한 것으로 안다.

그림의 오른쪽이 흡기구이고, 왼쪽이 배기구이다. 배기구쪽 동력축은 바로 변속기와 연결된다. 아래 헬리콥터에서 주로 쓰는 터보샤프트가 연비 면에서는 더 나을 것으로 보지만, 야전에서의 정비성 등을 고려하여 최대한 간단한 구조로 설계한 결과라고 짐작한다.

 

터보프롭


그림 3 터보프롭 (James Provost)

위 그림은 터빈 엔진의 출력을 프로펠러 가동에 전적으로 사용한다. 터빈 엔진의 구조는 아래 터보팬이나 터보젯 엔진에서 자세히 소개한다.

위 사진에서 프로펠러를 자세히 보면 블레이드가 회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주 소형 항공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터보프롭 엔진은 이러한 가변 피치 프로펠러를 사용한다.

 

터보샤프트


그림 4 터보샤프트 (MechStuff)

주로 헬리콥터에서 사용한다. 위 그림의 “To shaft & rotor blades”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동력축이며 여기에 헬기 블레이드(날개)가 연결된다.

그림의 좌측이 흡입구이고, 바로 뒤에 동력축, 압축기, 연소실, 터빈이 있다. 그림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압축기는 8단에 원심력 방식 압축기가 추가되어 있고, 터빈은 6 (혹은 7-5) 구성으로 보인다. 이는 아래 다른 터빈 엔진과 비교하면 압축기 대비 터빈이 많은 편이다. 그림의 오른쪽 배기구 형상은 직선이 아니기에 추진력을 얻는 구조는 아니며 순수히 연소가스를 배출하는 역할만 한다. 그래서 터빈 단 수가 더 많은 것으로 짐작한다. 터보팬의 경우 팬을 가동하기 위해서 터보샤프트에 비해서는 터빈 팬 단 수가 적고, 전투기용 터보젯의 경우 보다는 더 많다. 이는 추력을 어디에서 얻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추력이 분사에너지()에 의존하는 경우에는 터빈은 엔진 가동에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되고, 팬이나 샤프트 경우처럼 출력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는 경우에는 터빈이 많은 구동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터빈 단 수도 많다.

 

터보팬


그림 5 터보팬 (Rolls-Royce Trent 1000)

대부분의 상용 제트기에서 볼 수 있는 엔진이다. 사진은 B787 등 최신 항공기에 쓰이는 최신 터보팬 엔진이다.

그림의 왼쪽에 팬이 있고, 그 뒤로 터빈 엔진(보통 코어라고 함)이 있다. 사실 위에 보인 터보프롭과 매우 유사하다. 팬이 프로펠러라고 보면 된다. 팬을 통과한 공기 중 코어를 통과하지 않고, 프로펠러처럼 바로 빠져나가는 공기 대비 코어로 들어간 공기의 비율은 (바이패스율, bypass ratio) 10:1 정도이다. 그래서 고바이패스 (hi bypass) 엔진이라 한다. 코어를 통과한 공기는 아래 터보젯에서 설명하겠지만 제트 추력을 만드는데, 추력 기준으로는 팬을 통과한 전체 공기 대비 제트 추력의 비율은 약 10:2 이다. 이는 제트 추력은 연소 가스의 비중과 속도가 바이패스 공기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작용-반작용 법칙에 의해 제트 추력이 증가하기 때문에 바이패스는 10:1 이나 추력은 10:2 이다.

 

터보젯


그림 6 터보젯 F414 (GE)

사진은 미 해군 주력 함재기인 호넷(F-18 Hornet), 한국의 KF-21 등 많은 현용 전투기가 사용하는 엔진이다.

위 터보팬 엔진과 비교하면, 흡기구의 크기가 상당히 작음을 볼 수 있다. 약간의 바이패스는 있으나 흡입한 공기의 대부분은 코어로 들어간다. 그래서 저바이패스 (low-bypass) 엔진이라 한다. 그 말은 대부분의 추력을 제트 분사에서 얻는 다는 뜻이다.

 

항공기의 전기화 및 그에 따른 엔진 설계의 변화

과거 항공기는 주로 유압장치로 조종했다. 움직이는 거의 모든 부분이 유압(+공기압) 장치로 작동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날개에 붙어 있는 플랩과 슬랩, 후방에 있는 스테빌라이저, 엘리베이터, 러더, 등 수많은 장치를 유압으로 작동했지만, 점점 더 많은 장치들을 서보 모터로 작동하여 전기화(fly-by-wire) 되었으며 AESA 레이더 등 많은 장비가 전자화 되면서 전력 소요가 크게 늘었다. 이는 상용기에서 먼저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지만, 군용기에 있어서도 같은 소요는 존재한다. 특히 레이저 무기(airborne laser, ABL)는 비록 초창기 B747 기반 YAL-1 ABL 프로그램은 폐기되었지만,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어떠한 목적과 형태의 ABL이든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군용 항공기에 있어서 엔진에서 전력을 얻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엔진 시동

항공기 설계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시동 모터는 시동시에만 가동하고, 최초 시동이나, 특수하게 공중에서 재시동하는 경우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무게도 상당하다. 상용기의 경우에는 운항을 위한 추력 생성이 아닌 순전히 기체 작동에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보조엔진(auxiliary power unit, APU)을 갖고 있다. APU는 전기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압축공기도 만든다. 군용 항공기는 아마도 없을 듯 하고, 특히 전투기는 분명 없을 것이다.

최신이 아닌 경우, 보통의 상용기는 APU에서 만든 압축공기로 엔진을 불어서시동을 건다. 한 엔진이 시동이 되면, 그 엔진에서 만든 압축공기(bleed air)로 다른 엔진을 시동한다. 경우엔 따라서는 지상에 있는 장비가 압축공기를 공급하여 항공기 엔진을 시동한다. 군용 특히 전투기의 경우에는 아마도 모두 지상 장비로 시동할 것으로 짐작한다.

 

발전기-모터 (variable frequency starter-generator, VFSG)

전투기의 경우 시동 모터는 필요 없다 하더라도, 항전장비 등 전력 수요는 현용 전투기도 상당하기 때문에 발전기는 있다. 최신 상용기 엔진은 모터 겸 발전기(starter-generator)를 사용한다.


그림 7 GEnx VFSG

위 최신 GE 엔진에는 VFSG가 보인다. 컷아웃 뷰가 없지만, 짐작컨데 저속 압축기 축에 기어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는 전력 소요가 그리 크지 않을 경우에는 무난하나, 훨씬 많은 전력 생산을 위해서는 다른 설계가 필요하고, 최근 연구되고 있는 것이 코어의 구동축에 VFSG를 통합하는 것이다.

 

아래 F-414 엔진의 컷오프 뷰에 VFSG의 가능한 위치를 예시하였다. 물론 구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필요가 없어서 안 했지, 기술적인 문제로 못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할 경우 엔진의 구조가 간단해진다는 또 다른 유인도 있다.


그림 8 F414

 

KF-21

현재 KF-21은 위 GE F-414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국산 엔진을 개발할 경우, 동축 VFSG를 적용하고, 그에 맞춰 ABL을 장착해서 미국도 놀랄 전투기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2021.10.30

최원영

2021년 10월 28일 목요일

순수의 위험성 (초고)

 순수의 위험성

 

단순, 간단, 명료, 순수는 그 자체로 좋고 아름다운 것이며, 진리의 중요한 속성으로 믿어진다. 이는 어떤 문화, 학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기에 가장 보편적인 믿음도 위험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정리(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 기하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있고, 대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대수학적인 증명이 훨씬 쉽다. 피타고라스는 순수하게 기하학만으로 증명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하학을 대수학보다 더 순수, 그래서 우월하다고 봤다. 좌표 시스템이 대수학에 도입되면서 기하학은 사실상 소멸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있어서 수학은 일종의 종교였다. 수학이 천지창조와 우주작동의 근본원리라 생각했다. (종교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이 점만으로도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의 섭리를 찾기 위하여 온갖 수학적 탐구를 하였다.

 

미적분과 통계학

미적분에는 무한대와 수렴의 개념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수학의 다른 영역에 비해 미적분이 실용성이 가장 높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무한대와 수렴은 절대적이나, 대학 수준 미적분에서는 어느 정도 큰 수는 무한대로, 충분히 접근하는 경우에는 수렴으로 간주한다.

통계학은 미적분에 기초한다. 표본의 수가 무한대이면 모든 분포는 정규분포로 유도된다. 현실 통계학에서는 표본의 수가 30을 넘으면 정규분포를 적용한다. 이는 30을 무한대로 간주한 결과이다.

간주는 피타고라스가 봤다면 절대 용납하지 못 할 일종의 더러운 폭력이다. 수학은 피타고라스 쪽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울지 모르나, 미적분과 통계학의 유용성은 사실 이런 간주즉 더러운 폭력의 결과이다.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

톨레미의 천동설에 의한 천문도는 매우 복잡하다. 행성은 안정된 타원 궤도를 그리지 않고 좌우로 움직인다 (그래서 행성 planet은 어원적으로 방랑자라는 뜻).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하면 천문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간단해진다. 질량을 지닌 행성이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있을 수 없으므로 지동설이 맞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에 앞서 천문도가 훨씬 간단해진 것 만으로도 지동설의 우위는 분명하다.

이후 지동설이나 뉴튼 물리학으로 설명되지 않은 이상한 혹은 예외적인 지저분한현상들이 발견되었고, 이는 다시 아인시타인 등에 의해 청소되어 좀 더 간단(순수)해졌다. 뉴튼의 물리학이나 아인시타인의 물리학이나 다 맞고, 우열이 없다. 양자는 적용이 필요한 상황이 다를 뿐이다. 억지로 비유를 하자면, 현미경 쓸 때와 망원경을 쓸 때가 다를 뿐이다.

 

종교에서의 순수성

그리스 로마의 범신론, 힌두교 등 만신론 대비, 유일신교의 교리가 더 간단하다. 유일신교 가운데에서도 예수처럼 반인반신(demigod)의 존재가 있는 종교도 있고, 없거나 이를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반인반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대교나 무슬림의 교리가 논리적으로는 더 간단하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신과 예수의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고, 간단히 말하면 그게 교부철학이다. “힌두교화되기 전 불교는 심지어 유일신의 존재도 없었고, 그런 점에서는 무신교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논리적으로는 가장 간단하고 깔끔하다. 설명할 유일신이나 반인반신 존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 예수, 마호멧 공히 천국의 존재 자체는 언급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천국에 관한 수많은 질문에 전혀 답하지 않았다. 이들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의 결과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더 많은 질문. 어떠한 답도 더 많고, 더 난해하고, 더 무의미한 질문을 만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제일, 그리고 유일하게 깔끔한 상황은 질문도 없고 답도 없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우주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완전한 무가 정답이지만, 질문자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신앙과 윤리

종교에서 신앙과 윤리는 별개이다. 신앙은 신의 섭리이며, 윤리는 인간의 (더 정확히는 사회의) 약속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신앙은 윤리에 우선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그 결말이나 해석은 최소한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아들이 윤리를, 제물이 신앙을 의미하며, 종교에서는 신앙과 윤리는 별개이며 신앙이 우선한다는 것이 여기서의 요점이다.

 

무슬림과 이슬람

정치화된 무슬림을 이슬람이라 한다. 무슬림은 신앙 그 자체와 개인적 신앙을 의미하며, 신정국가, 정교분리나 세속주의 부정, 종교지도자의 정치 관여 등의 상황이 있으면 이는 곧 이슬람이다. 이슬람을 이렇게 정의하면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샤리아 율법이 법이다. 역으로 샤리아 율법이 법이거나 심지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윤리일 경우 그 사회는 이슬람이다.

앞서 종교에서 신앙과 윤리는 별개라고 하였으나, 이를 부정하고, 윤리 즉 법(“법은 최소한의 윤리라는 면에서)을 신앙에 복속시키거나, 아예 율법 이외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 이슬람이다.

 

세상은 더럽다

세상 즉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더럽다”. 이는 자명하거나, 주위를 한번만 둘러보거나, 언론 보도 몇 줄을 보더라도 분명하기에 설명이 필요치 않다.

세상이 순수하다면, 다른 말로 이상적이라면, 이는 정의에 의해 천국이다. 세상이 천국이라는 것은 자명한 모순이다.

역사는 현실의 누적이다. 따라서 역사도 더럽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진보한다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정한 역사의 방향이 있고, 역사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또한 그 방향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 , 그들은 역사의 방향은 그들 편이라고 주장한다. 방향성이 있어야 진보가 존재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역사는 우리 방향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진보한다그리고 역사는 진보한다, 우리는 그 방향에 있다두 말은 각각 그 자체로 동어반복이며 순서만 바꾼 같은 말이다.

한편, 역사는 (항상) 퇴보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플라톤이 그 원조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시작에 이상적인 사회가 있었고, 이후의 모든 변화는 그 이상향에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에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대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순전히 철학적인 사고도 세상은 더럽다는 명제를 부정하지는 못 한다.

플라톤 수준은 아니더라도, 변화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보수주의는 변화를 부정적으로, 진보주의는 긍정적으로 본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이것이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순수한 행동

더러운 세상을 청소, 즉 이상화하려는 노력은 항상 있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고,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나 세상을 청소하겠다는 행동주의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순수 즉 이상의 눈으로는 어떤 것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이상의 눈으로 평가하고, 선악의 가치관을 적용하여 어떤 것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수한 노력이라 해도 이념화된 행동이 된다.

순수한 행동은 이념화되면 위험하다. 존재하는 것들의 더러운 역사와 그것이 현존하는 더러운 현실을 무시하면 그러한 행동은 이념화된 행동이다.

 

역사는 더럽다

앞서 언급한 더러운 세상을 청소하려는 순수한 행동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역사를 다림질 하려는 시도도 많다. 이는 더러운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이며, 이에 더해 역사는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역사는 현실의 누적이고, 현실 자체가 더러운 세상이기에 역사도 더러울 수 밖에 없다.

역사 바로잡기나 수정주의는 이념화된 세계관이다. 역사의 궤적은 사이먼(Herbert A. Simon)[1]이 말한 대로 무작위적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과 반혁명 과정, 과거 소련과 오늘날 정반대의 러시아를 보거나, 중국의 최근 대약진운동의 재등장을 보면 역사의 굴곡은 바로잡기에는 너무 많다. 바로잡기 자체도 가능성을 떠나 매우 위험하고 오만한 시도이다.

 

혁명과 진화 (revolution & evolution)

사전적으로 혁명의 반대말은 진화이다. 또한 사전에 evolution“1. 진화”, “2. (점진적인) 발전[진전]”[2]이다. 이 글에서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혁명의 반대말의 의미이다.

앞서의 순수한 행동이 혁명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경우가 공산주의이다.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정의로는 충분하지만, 기존체제(ancien régime) 타도가 그 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헤겔의 역사관,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가치관, 레닌의 실행이 그 맥락이다. , 프랑스 혁명은 현실의 모순에서, 러시아 혁명은 이념화된 가치관에서 출발하였다. 그 결과나 의미는 역사책 한두 권 보면 충분할 것이다.

모든 혁명은 실패했다. 소련이든 쿠바든 한 때 성공한 것으로 보였던 모든 혁명은 결국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좋게 말해, 실험이었다.

동일한 문제의식과 동일한 결과를 갖더라도, 그 과정이 점진적인, 즉 진화의 경우, 폭력도 없거나 적었고, 결과는 유지되었다. 많은 예외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아니라 진화가 사회변화에 더 효과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탈레반, 원리주의, 근본주의

이들의 공통점은 이상을 현실에 강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 모두 그들의 주장과 행동에 모순이 많지만, 일단 주장하는 바를 다 인정하고, 개념적으로만 볼 때 그렇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그들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하려는 재세이화(在世理化) 태도는 있었다. 이는 그들의 사명이자 의무이다. 문제는 더러운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이기도 하지만, “더러운 현실을 수용할 수 없는 순수는 무책임한 실험 일뿐이다.

 

순수한 세뇌

안타깝게도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세뇌에 약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어린이에 대한 세뇌는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위험하며, 가장 혐오스럽다. 한마디로 순수에 대한 순수한 세뇌가 가장 위험하다.

영국 철학자 러셀은 부모가 그들의 어린 자식에게 종교를 이식하는 것을 문제시 했다. 이는 모든 사상(종교 포함)에서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는 문화의 정의라 할 수도 있다. 피할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문제이지만 몇 가지 예로 그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슬람 경우, 마드라사에서 어린이에게 무슬림 및 샤리아 교육, 불교 등 경우, 사원이 고아원 혹은 유치원 역할을 하면서 어린이가 불교에 젖게 하는 교육, 어린이에 대한 소련의 소비에트 교육과 중공의 국수주의 교육.

어떤 것이 세뇌이고, 어떤 것이 교육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렵고, 그것이 문제이다.

 

더러운 순수

순수가 진리에 부합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문화, 종교, 학문에서도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믿음이다. 반면 세계는 더럽고, 그를 모르거나 부정한다면, 순수는 근본주의가 되어 극단적인 행태를 가질 수 있다. 순수한 이상과 더러운 세상을 동시에, 그리고 같은 수준으로 이해해야만 개인이든 사회든 건강할 수 있고, (정의가 무엇이든) 발전할 수 있다.

 

2021.10.29

최원영



[1] https://en.wikipedia.org/wiki/Herbert_A._Simon

[2] 옥스퍼드 영한사전

2021년 10월 25일 월요일

푸틴 발다이 포럼 연설

 

푸틴 발다이 포럼 연설

 

우연히 이 연설에 대해 듣기 전까지 푸틴에 대한 나의 인상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리트비넨코 방사능 홍차독살 그리고 정적 나발리에 대한 집요한 탄압, KGB 걸음걸이 (오른팔은 총을 뽑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왼팔만 흔드는), 마초 이미지, 옐친과의 기괴한 정권이양 정도였다.

 

이 연설의 개략을 듣고, 그 내용에 흥미가 생겨 영문판 전문을 읽어보았다. 나중에 이 연설의 내용에 관해 나름 생각한 점을 별도로 쓸지도 모르겠으나, 이 글은 연설문 및 연설가에 한정하여 느낀 점을 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용에 대해 일정한 언급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연설의 출처는 크램린궁 공식 사이트(http://en.kremlin.ru/events/president/news/66975)이다. 연설은 2021.10.21 21:25에 소치 발다이 (Sochi, Valdai) 에서 했다.

 

청중은 대학교수, 연구소 연구원, 언론인, 외교관이나 국제관계 전문가들이다. 푸틴은 37분간 프롬프터 없이 연설했다. 원고는 있었으나, 일부는 메모 형태, 일부는 원고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상당히 긴 연설이나 상당 시간 원고를 곁눈질로 메모 참조 정도만 하면서 고개를 들고 연설했고, 일부는 원고를 보면서 하거나, 끝부분에서는 읽기도 하였다. 청중과 눈맞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청중의 성격상 정치인의 연설이라기 보다는 학회 기조연설 같은 느낌이었다. 푸틴은 국가정상들이 보통 그러하듯 자국어인 러시아어로 연설했으며, 영어로 동시통역되었다. 동시통역 내용과 크램린 공식 사이트에 게시된 내용은 약간 다르다. 이는 푸틴의 연설이 사전에 조율된 원고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정상의 연설은 대부분 전문가 참모가 작성한다. 푸틴은 마틴 루터 킹 연설을 인용하면서, 그 부분을 자신이 직접 넣도록 했다고 말했다. 역으로, 연설을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굳이 이런 식으로 밝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이라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 작성자가 누구이든 매우 잘 쓴 글이다. 연설문 참모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다. 작가라기 보다는 작가 소질이 있는 전략 참모이며, 다른 참모 대비 영향력도 크다. 푸틴의 참모는 푸틴의 정책이나 생각을 잘 이해하는 참모이겠지만, 이 글은 그 구성이나 표현이 마치 푸틴이 직접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연설 이후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이는 오롯이 푸틴 혼자 대응했다. 질의응답에서 푸틴의 논리전개는 마치 군사작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전략적이었다.

 

화법에 있어서 영어권에서는 ‘you’를 많이 쓰라고 한다. 이는 3인칭보다는 가급적 2인칭을 사용하여 청중과의 거리를 줄이려는 것이다. 푸틴은 이를 넘어 너도 알고 나도 안다식의 표현을 써서 공감을 잘 유도하였다. 몰론 이는 푸틴 본인이 자신과 여러 이슈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인식을 알고 있고, 공감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러기에 너도 알고 나도 안다라는 말이 공감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화든 연설이든 그 목적은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푸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만든 웃통 벗고 말 타는 마초 이미지로 근육의 힘을 일차적으로 연상할 것이다. 또한 그가 미국과의 대결이나, 반대파 혹은 적대적 언론과의 관계 등으로 그의 의지의 힘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번 연설은 내용 자체나, 연설자로서 그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이나, 질의응답에서 보여준 지적 능력으로 두뇌의 힘도 충분히 보여줬다는 생각이다. 특히 역사와 문화,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논쟁의 강력한 무기였다.

 

질의응답에서는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도 상당히 가시 돋친 질문을 했으나, 푸틴은 오히려 이 질문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노벨상 수상에 대한 축하도 빠뜨리지 않았다. 언론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진심 어린 축하였다. 이 점은 푸틴에 대한 고정관념을 상당히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정치인에게 연설은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푸틴은 KGB 출신이다. 정보기관과 연설은 뭔가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한다. 그의 다른 연설은 본 적이 없지만, 청중이 일반대중일 경우 보통 보는 정치인과 같은 연설도 평균 이상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설은 학자들을 상대한 것으로 선동이 아니라 논리가 우선되는 것이었다.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을 상대로 공감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강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브레인 파워에 있어서는 현존 어떤 국가원수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시진핑의 궤변[1]도 없고, 바이든의 우왕좌왕도 없고, 일본은 언급할 지도자도 없고, 메르켈은 은퇴했고, 마크롱은 아직 체급이 안 될 것 같다.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가원수의 개인적 능력이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겠으나, 굳이 예를 들자면, 정상회담에서는 분명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겸손은 항상 미덕이지만, 푸틴 앞에서의 오만은 (배석자가 없다면) 상당한 자괴감으로 결과될 것이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21.10.26

최원영



[1] https://www.scmp.com/news/china/politics/article/3152389/xi-jinping-says-chinas-democratic-political-system-great

2021년 10월 20일 수요일

역사의 방향성

 

역사의 방향성

 

역사는 방향성을 갖고 있고, 자신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상대방은 다른, 즉,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주장은 국제정치에서 흔히 보는 주장이다.

시진핑은 서구 중심의 역사는 끝났으며 중공이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1945년 마오쩌둥, 1981년 덩샤오핑 이후 세번째의 역사결의를 한다고 한다.[1] 집권자가 자신의 역사를 정의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에는 분명 중공이, 심지어 본인이, 새로운 그리고 바른 역사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주장이 있을 것이다.

 

헤겔은 역사는 끊임없이 전진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그 전진은 세계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소련의 등장으로 세계는 양극체제, 그 붕괴로 단극체제가 되었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 과정으로 역사가 전진한다고 하였는데, 소련의 붕괴로 정반 중 하나가 없어졌으니 합도 있을 수 없고, 역사의 전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Francis Fukuyama 1992,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기본 모티브이다.

 

중공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역사의 퇴보로 보이는 현상들이 너무 많아, 개인적으로 좌절과 실망을 많이 느낀다. 역사에 방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든다. 생물학에서 이에 관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시간과 변화가 존재하면 곧 역사라는 의미에서, 물리학도 매우 넓은 의미의 역사성이 있을 수 있고, 생물학은 그 자체가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봐도 생물학의 역사에서는 찰라 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을 인류 역사에 참고하는 데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단위)의 차이를 주의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종교와는 근본적인 부조화가 있음을 인정하며, 그에 대한 어떠한 견해에 대해서도 중립적임을 미리 밝힌다.

 

史庫로서의 유전자

인간 유전자(게놈) 1-2%만 단백질 합성에 관여한다.[2] 나머지는 비활성이다. 비활성 유전자의 일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간접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도 안 한다. 척추동물 같은 고등동물뿐만 아니라 박테리아처럼 단세포 생물에서도 대부분의 유전자는 비활성이다. 왜 이렇게 많은 유전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생물체는 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을까? 활성 유전자는 현재 생물체를 만들고, 재생하기 위해 사용되는 청사진이자 스냅샷이고, 비활성 유전자는 현재 생물체의 계통발생(단세포에서 현재 종까지의 진화) 과정의 기록을 저장하고 있는 저장소(史庫)라 생각한다. 개체발생(수정란에서 출생까지)의 과정에서는 계통발생 과정에서 소멸된 일부 기관이 일시적이라도 발현한다. 유전자의 역할, 비활성 유전자의 존재, 개체발생 과정에서 임시 기관의 발현에 필요한 정보의 필요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비활성 유전자가 계통발생의 정보역사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史庫, archive)라는 것이 (최소한 개인적) 결론이다.

 

유전자의 방향성

고래는 육상동물이었지만 바다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아가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는 고래뿐만 아니라 모든 파충류 이상 수생동물의 공통점이다. 고래가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아가미가 더 효율적이었다면 아가미가 다시 나타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경우와 달리 고래가 유일하게 전 생애를 바다에서 보내는 포유류이다. 새끼가 태어날 경우 호흡을 위해 어미가 새끼를 물 밖으로 업듯이 해서 노출시킨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이 불가피한대도 허파로 공기 호흡을 하는 이유는 산소 획득에 허파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고래는 수중생활에 적응하여 음파로 (그러나 공기를 매체로 하지 않는 다른 방식) 통신한다. 물속에서는 다른 수단이 효과가 없다. 전파도 물속에서는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잠수함도 음파(소나)를 사용한다.

 

요약하자면, 생물에 있어서 환경이 급변하거나 경쟁이 극심해져서 존립에 위협을 받는 환경에서는 모종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생물은 1)비활성 유전자에서 쓸만한 참조를 찾아내거나, 2)아예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중 적합한 변화를 찾아낸 개체가 생존하고, 번성해서 새로운 형질로 이어진다. 두 경우의 변화는 공히 주어진 환경에서 효율적이어야 한다. (두 경우 공히, 특히 1) 경우, 내가 배운 한에서는 맞고, 이 글의 논지이지만, 확립된 이론인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근거를 찾지도 않았다.)

 

생물학에 있어서 역사의 방향성은 표면적으로, 그리고 현생 생물의 경우에 있어서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으로 고래). 그러나 이런 방향성은 비활성 유전자, 즉 史庫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론

논리전개 상 일차적인 결론은 史庫가 존재해야 역사의 방향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생물체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동물의 경우 특정 기관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그런 기관을 찾아내려 노력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결론은, 그런 기관은 없고, 세포 단위에서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모든 세포에 있다. 시간을 세포 단위에서 인식하는 것처럼, 史庫도 모든 세포에 있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다른 史庫, 즉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이는 정의에 의해 癌이다. 참고로 癌의 정의는 이상 세포의 통제불가 증식 (uncontrolled growth of abnormal cells)”이다.)

 

나의 두 번째 결론은, 史庫는 모든 세포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생물체를 맞비교하는 것(의미는 다르지만 나치가 한 짓)은 매우 위험한 짓이다. 다만, 특정 위치에 단단히 잠긴 채로 있는 史庫는 최소한 역사의 방향성에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2021.10.21

최원영



[1]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03574#home

[2] https://en.wikipedia.org/wiki/Gene

2021년 10월 16일 토요일

환경포퓰리즘 (초고)

 

환경포퓰리즘

 

아직도 (특히 미국에) 탄소 배출과 기후변화는 관계가 없다거나 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빈발해지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무식하거나 이념적 편향에 의한 왜곡된 인식을 하는 사람들로 치부되고 있다. 이상기후나 해수면 상승 등 온난화의 영향은 대부분의 지구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보도를 통해 알게 되어 일종의 지구적 집단기억수준에 도달했고 비로소 정책에 반영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1997년 교토 의정서 제정 당시에는 온실가스 문제는 학계에서만 인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부정하거나, 회피하였고, 각국 정부도 온실가스 감축의 경제적 여파가 너무 커서 실질적인 조치에는 미온적이었다. 미국은 아예 참여도 안 했다. 그 당시에도 학계는 대처가 이미 너무 늦었고, 너무 소극적이다 하였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으로 비로소 대부분(192개국)의 나라가 참여하고,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제시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지만, 지금이라도 진정한 행동으로 실행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탄소중립이 정치적 구호가 되어 오히려 현실성 없는 정책이 남발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 탄소중립은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산림 등에 의한 흡수와 동일해지는 수준을 의미하며, 현재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배출량을 동결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보다 절대 배출량을 크게 줄여야만 가능하다. 이들 정책이 요구하는 경제적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이해도 못 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장밋빛 환상만 제시하는 환경포퓰리즘이 되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시진핑은 2030년 탄소배출 최대치, 206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매우 야망 찬 목표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

 

환경문제와 전혀 무관한 상황으로 인해 시진핑의 무식과 전체주의의 취약성과 탄소중립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호주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호주 산 석탄 수입을 금지한 결과, 중국 발전의 56.6%를 차지하는 석탄 화력발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광범위한 전력부족과 정전이 발생했다.[2] 전세계 평균으로 추정해도 발전량보다 많은 석탄이 난방용으로 필요할 것이다. 가용한 석탄을 발전용으로 쓰던, 난방용으로 쓰던, 현재 상태라면 중국은 난방이나 전기 둘 중 하나는 극심한 부족을 겪을 것이다.

최근에는 호주 산 석탄 수입을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보도되고 있으나, 이번 겨울은 상황 개선이 거의 불가할 것으로 본다. 발전뿐만 아니라 난방,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하게 철강 생산에서 석탄 의존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그 석탄의 60%를 공급하는 호주 산 석탄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은 명백한 자살행위이다. 시진핑 주변의 이런저런 학자나 정책입안자들이 어떤 조언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정은 시진핑이 한 것이다. 공산당이 국가의 주인인 중공에서 절대권력자인 시진핑이 일단 결정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결정이라도 일단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공이고, 이는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마찬가지이다. 이제 와서 문제가 심각해지니 그간의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 것도 시진핑의 권력이자 책임이며, 이 역시 중공 내지 전체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한 탄소배출에 관한 목표치는 결국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과학적, 경제적 결정이 아니라 이념적, 정치적 선언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미 심각한 정전과 곧 나타날 난방 문제는 석탄, 즉 화석연료의 부족이나 대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증명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문재인은 2021.10.8일 탄소중립위에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대폭 상향했다.[3] 산업계에서는 비현실적목표라며 반발하고 있다. 무식과 무대책은 가히 시진핑 급이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논란/선동/난동[4]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특히 외신 보도를 보면서 한국인이 이렇게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라는 인상을 줄 것이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광우병 선동은 문재인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인정하더라도, 앞서의 문재인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중국 시진핑의 발언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느낌 좋은숫자인지 모르겠으나 40%란 감축목표는 무식과 무책임의 극치이다. 이번 문재인의 한마디는 광우병의 광기와 시진핑의 무모함이 결합된 것이다.

 

문재인의 탈핵

문재인이 어떤 영화를 보고 탈핵을 결심했다 해서 그 영화를 직접 보았다. 대략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비슷하고, 원자로 노심이 녹아 폭발하는 점이 다르다. 후쿠시마 경우 노심이 녹아내린 것은 맞다. 폭발도 있었다. 그러나, 노심의 폭발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SF 영화였다. 차라리 체르노빌 사고를 염두에 두고 탈핵을 생각했다면 좀 더 합리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과정은 더 문제가 있다. 문재인의 월성 1호기의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한마디에 논문 인용도 많이 되던 학자로서는 괜찮았던 백운규는 너 죽을래라고 실무자를 압박하고, 경제성 평가도 조작하여 끝내 조기폐쇄를 했다.

한국도 탄소배출 규제, 발전 단가 상승 등으로 결국은 원전 이용률이 상승했다. 시진핑의 석탄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에너지원 비교

주제와 관련 아주 잘 정리된 자료가 있어 아래 첨부하였다.[5]

일단 차트에서 보면, 전체 에너지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략 40%인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은 100% 발전용이라 보면, 전기의 비율이 10.4%, 전체 에너지 중 비율이 4.3% 이므로, 즉 같은 수치가 분모에 따라 작아진 것으로 보면, 41%이다. 수력, 풍력, 태양광도 거의 같은 결과이다.

 


이 결과를 표로 정리하였다.

전력비중 *1 (*3/*2)

전력 *2

에너지 *3

전력비중 @40% *4

전력외 에너지 *5 (*3-*4)

석유

3.1%

33.1%

1.2%

31.9%

석탄

36.7%

27.0%

14.7%

12.3%

가스

23.5%

24.2%

9.4%

14.8%

41%

10.4%

4.3%

4.2%

0.1%

수력

41%

15.8%

6.4%

6.3%

0.1%

풍력

42%

5.3%

2.2%

2.1%

0.1%

태양광

41%

2.7%

1.1%

1.1%

0.0%

기타

2.5%

1.6%

1.0%

0.6%

 

100%

100%

40%

60%

*1:  대부분 전력용인 에너지원의 총에너지에 대한 비중 (*4, *5 계산시 적용)

*2:  차트의 Electricity only

*3:  차트의 Total energy

*4:  *1 결과를 40%로 하고, 모든 에너지원의 40%를 전력용으로 가정한 에너지원별 총에너지 비중

*5:  총에너지 *3에서 전력용 *4을 차감한 비전력용 에너지 (*3 총에너지 대비)

 

위 표의 주석에 있지만, 석유, 석탄, 가스 등 화석연료의 발전용 사용량을 비화석연료의 비중과 같이 적용하였다. 화석연료의 전력 및 비전력 용도는 크게 차이 날 수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발전용 에너지

전체 발전용 연료 중 63% 정도가 화석연료이다. 이 부분 에너지 믹스를 변경하는 방법은 비화석연료의 비중을 높이는 것뿐이다. 신규 발전소는 비화석연료로 건설하고, 기존 화석연료 발전소는 조기 도태시켜야 한다.

 

화석연료는 전체 발전용 연료 중 63%, 전체 에너지에서도 25%를 차지한다. 발전용이 아닌 용도로는 전체 에너지의 59%를 차지한다. 대안이 되는 핵, 수력, 풍력의 전력 생산 분담율을 보면 수력이 16%로 가장 크고, 핵이 11%, 태양광이 3% 수준이다.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입지가 얼마나 남아있는지가 문제이다. 태양광의 경우 입지가 제한적이고, 가장 큰 문제는 중금속 덩어리라 할 수 있는 태양광 패널의 폐기 방법이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태양광 발전을 한다고 심각한 환경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의 온갖 부정부패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제외하더라도 상용 발전수단으로의 태양광은 매우 회의적이다. 풍력발전도 한국의 경우 심각한 환경파괴 문제가 있다. 입지조건이 좋은 북해의 경우에도 풍량의 변화로 발전을 못 하고 있다는 기사를 최근 본 적이 있다. 그에 더해, 바람의 역할을 풍력발전이 간섭하는 여파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도 없다고 본다.

 

비발전용 에너지

위 표에 정리한 대로, 발전용이 아닌 에너지원은 전체 에너지 수요의 60%를 차지한다. 발전용이 아닌 연료 중 전체 에너지 수요에서의 비중은 석유 42%, 석탄 12%, 가스 15%이다. 석유는 자동차 등 운송수단과 난방용이 대부분이다. 석탄은 난방용과 제철 등 산업용이 대부분이다. 가스는 (발전용은 제외했으므로) 주로 난방용 내지 취사용이다.

문제는 이들 용도는 발전용에 비해 사용량을 줄이기 더 어렵다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차량과 난방이 주용도이고, 차량의 경우 최근 전기차가 (거의) 대세가 되어가지만, 10년 이상을 사용하는 내구재인 자동차 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전기차가 대세가 된다고 해도 전술한 발전용 에너지 문제로 전환될 뿐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석탄의 경우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연료로, 대체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가스는 다른 화석연료에 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이 적지만, 역시나 화석연료로 온실가스 배출은 불가피하다. 가스는 도시가스로 보통 난방용과 취사용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전기로의 전환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효율(=가격)에 있어서는 전기 대비 월등한 이점이 있다. 수많은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스를 전기로 대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전기로 대체하더라도 석유와 마찬가지로 발전용 에너지 문제로 전환될 뿐이다.

결국, 비발전용 에너지의 용도가 발전용으로 전환된다고 해도, 결국 문제는 발전용 에너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현재 전체 에너지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40% 수준이나, 비발전용 에너지의 전기화가 진행된다면 전기의 비중은 급격하게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80%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며, 사실 탄소중립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조현병 (schizophrenia)

노출 및 충격의 효과가 큰 것들은 정량적 분석의 결과보다 주목을 받는다. 모두에 언급했듯, 환경문제는 같은 이유로 주목을 받고,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최근에는 정치인의 개념 트렌드가 되어 시진핑이나 문재인이나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대책 없이, 아무 말이나 뱉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황당하고, 좌절을 느끼는 것은, 한 머리와 입으로 탄소중립탈원전을 말한다는 것이다. “원전 없이 탄소중립 없다”. 이는 전문가나 지식인 뿐만 아니라 최소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다. 한마디로 탈핵과 탄소중립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정신분열로 불렸고, 요새는 순화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조현병으로 불리는 정신병은 영어로는 schizophrenia이다. 어원을 보면 schism(분열), phren(정신), 즉 정신분열이다. 참고로 crack은 일부가 균열된 것이고, schism은 끝에서 끝까지 완전 균열 즉 분열된 상태를 말한다. schizophrenia는 한 몸에 두 개의 정신이 있는 상태이다. 탄소중립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탈핵을 요구한다면, 내가 보기엔, 내 정의에 의하면, 정신분열이다. 정신분열은 사이코다.

 

결론: 탈핵 반대

탄소중립은 이미 너무 늦었을 수도 있다. 대기 중 탄소를 효율적으로 채집하는 획기적인 기술이 나오기 전에는 탄소 즉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전기 등 에너지를 만드는 방법 중 탄소 배출이 없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방법은 원전이다. 수력 등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대에서 안정적인 전력 생산이 가능한 것은 원전이 유일하다. 다른 모든 이른바 대체에너지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피크 수요 대응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주력 발전으로는 어렵다. 게다가 태양광, 풍력, 지열 등 다른 방법들은 각각의 심각한 환경문제를 갖고 있다.

원전은 쓰리 마일 섬(TMI),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원전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 줄[6] 쓴 적 있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2021.10.16

 

최원영



[1] https://www.bbc.com/news/world-asia-china-57483492

[2] https://biz.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economy/2021/10/11/MUV45FZVRFATFKLVBDUIWHFWIQ/

[3] https://www.chosun.com/national/transport-environment/2021/10/09/4GTHC2YCDJED7AI4E4Z6FFAQCU/

[4] https://namu.wiki/w/%EA%B4%91%EC%9A%B0%EB%B3%91%20%EB%85%BC%EB%9E%80/%EC%9D%B8%ED%84%B0%EB%84%B7%20%EC%86%8D%EC%84%A4?from=%EA%B4%91%EC%9A%B0%EB%B3%91%20%EC%84%A0%EB%8F%99

[5] https://ourworldindata.org/electricity-mix

[6] https://cephalocide.blogspot.com/2021/10/blog-post_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