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출퇴근에 전철을 이용합니다. 지난 연말부터 오늘까지 기강해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보도가 안 될 수도 있어 직접 겪은 일 기록합니다.
작년말 경인선 및 경부선 전철 배차 조정한다고 했고, 그 결과 연초 며칠간 전철 시간표가 완전 엉망이었습니다. 시간표와 실제 배차는 완전 달랐습니다. 이전에도 배차 조정은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처음 겪었습니다.
엊그제 2/14일에는 구로역 "선로문제"로 출퇴근 시간 전철 운행이 몇시간동안 비정상이었습니다. 경인선 급행과 특급은 전부 취소되었고, 잘은 모르겠으나 일반 열차도 일부 취소된 듯 합니다.
다음날 15일에는 제가 탄 동인천 급행 전철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구로역에서 열차를 교체했습니다. 교체한 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전철문 내지 차단문 고장으로 옆 문을 이용하라는 안내방송이 2번 있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다른 문이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겪은 일이 저만 "처음 경험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불안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만 "처음"이 '불안'한 것인가요?
대한민국, 여러모로 그냥 예전 같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20.2.18
최원영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2020년 2월 6일 목요일
영혼 있는 공무원, 공무원공화국
영혼 있는 공무원, 공무원공화국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는
말이 한 때 논란이 되었다. 그 기사를 찾으려고 검색을 하려니 “영혼
있는 공무원”이 자동완성으로 나타났다. 이 글 제목이 그리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문구가 나타나 한편 놀라고, 한편 궁금해서 내용을 봤다. “대통령이 언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은 무슨 뜻?”[1]
제하에 문재인 대통령(이하 모든 대통령은 관행대로 성과 ‘통’으로 축약)의 언급을 포함하여 여러 사실과 해석을 제시하였다. (아시아경제 2017.8.23)
거의 모든 나라 법원에서 상징으로 쓰이는 정의의 여신[2]은
눈을 가리고 있다. 최초의 썬글래스는 중국 판관들이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페르마의 정리’로 유명한 페르마는 판사였고, 당시 판사의 일반인 접촉을 제한해서 취미로 수학을 공부했고, 수백
년간 풀지 못 한 수학적 난제를 만들었다.[3]
법치주의의 근본은 공평과 예측가능성임을 생각하면, 그리고 법치의 최후보루는 판사임을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가 이해가 된다.
위 아시아경제 기사에서 인용을 하면: 공직사회의 ‘영혼론’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관료제는 개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며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문통이 2017.8.22일 언급한 “정권 뜻에 맞추는” 공직자를 폄훼하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작자인 베버의 뜻은
오히려 법관 등 공직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라 볼 수 있다. 2020년
2월 오늘로 다시 돌아오면, 문통이 원한 ‘영혼
있는 공무원’은 조국, 추미애, 기타 문통의 (졸)개들
아니었나 생각한다. 베버도 무덤 속에서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는 늘공(늘(원래) 공무원)의 ‘영혼 있음’이 걱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개인적인 양심의 의미가 아니다. 판사가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면 이는 “양심”이 아니라 “편견”이다. 판사의
양심의 의미는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의 글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4]
‘국민정서법’은 법치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도 이 글에서 알 수 있다. 오늘 대한민국의 혼란은 ‘국민정서법’으로 분장한 정치공직자가 근본 원인이다. 이들 정치공직자의 문제는
‘정치적’이라 치고,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하려는 문제는 일반 공무원의 사고방식이다.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나향욱[5] 같은 사이코 공무원이 아니라 성실하고 선량한 일반 공무원마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제대로 이해 못 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7조
①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몇 가지 사례로 시작한다:
S2)
최근 지인을 통해 들은 바: 정부에서 제약사들
모아놓고 “구조조정”을 요구 내지 통보. 상당수 소규모 제약사들은 존폐를 심각하게 우려해야 할 내용이었다고 한다.
S4)
“한국에서 인터넷 및 관련 산업이 발전한 이유는
정부부처 이름 어디에도 ‘인터넷’이 들어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확인 불가)
지금이 60-70년대도 아니고, 이른바
산업정책이란 것이 필요한지 매우 의심스럽다. 박통 시절로 대표되는 고도성장기에 대한민국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자본을 파급효과가 큰 산업에 집중하였다. 이를 산업정책이라 흔히 부르지만 이는 국가 차원에서, 즉 거시경제 차원에서 특정 산업을 선택한 것이지 미시경제 차원인 개별 산업 내부의 기업의 의사결정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 등 거시경제정책이 정부의 일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큰 산업이라도 개별 산업은 미시경제의 영역이며 이는 정부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자본, 인적자원, 노하우
등 모든 면에서 기업이 정부의 도움이나 코치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공무원이 산업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수많은 인재보다 능력이 있을 이유는 하나도, 조금도 없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공무원은 기업 직원보다 심각하게 능력이 떨어진다.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인데 정치는 사류”, 이 말은 1995년의 발언이지만, 무려 25년이 지난 지금 더더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다.
정부가 특정 산업의 기업의 경영에 관여하는 (위 S1, S2) 행위는 한마디로 ‘건방’이다. 고시 한두 개 붙었다고 스스로 똑똑하거나 뭘 안다고 착각하는
“공무원선민” 의식일 뿐이다. 실무 않는 의사는 의사가 아니다. 사법고시 합격자는 사법연수원에서
또 다시 2년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고도 경험부족으로 소장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 하는 신참 변호사나, 어의 없는 실수로 의뢰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변호사의
경우도 많다. 실무 혹은 실전 경험이 있어야 지식도 비로소 體化되고 현실적용이 가능하다. 고시 과목에 반도체, 자동차, 원자력공학, 화학공학, 등등의 과목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실전경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공무원이 스스로가
민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식해서인지 용감해도 너무 용감하게, 그리고 건방지고 오만하게 민간 기업의 총수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들여 가르치려 든다. (지식과 경험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리가 회장 가르치려 드는 정도이다.)
대한민국 교육이 살려면 교육부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위 S4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 산업이 부흥할 때 공무원
중에 인터넷이 뭔지도 몰랐을 공무원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거나 억울하다 생각하는 공무원
분들은 인터넷 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시점을 기억해 보시라. 그리고
Wikipedia 영문판을 찾아보시라. TCP가 뭔지, UDP가
뭔지, IP가 뭔지, TCP/IP가 뭔지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시라.) 최근 기사를 보면, 이해관계 충돌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오늘의 공무원들은 인터넷 사업모델이나, AI,
IoT, 5G 등등에 대해 많이 안다고 착각하거나 아는 척 하고 있다. 장담컨대, 늘공 중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표제의 “공무원공화국”은
위 S3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보조금과 다른 법적, 행정적 통제로 대학은 등록금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얼마 전
읽은 기사에는 인당 보조금이 초등학교가 대학보다 많다고 한다. 상식이 어디에 있는지 나 자신을 믿지
못 할 정도이다. 고등학교도 정부의 보조금과 이러저러한 법적, 행정적
통제로 사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심지어 사유재산권 침해까지 발생할 수 있다. 개인과 민간단체의 의사결정을 이처럼 심각히 제한한다면 그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민주도 아니고 공화국도 아니다. 민주는 공무원주(권)로, 공화국은 사회국 내지 공산국으로 변질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다시 쓰자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공무원주권사회국가’이다. ‘공무원주권공산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대하거나 의심한다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준에서 다시 보시라. 진정 주권이 “개.돼지” 국민에게 있는지,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시라.
정치권과 어공은 정치지형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늘공이다. 최근 늘공의 정치화와 건방이 권력화 내지 주권화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
세상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한번
만들어진 변화를 되돌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것은, 이 정권이 뿌린 포퓰리즘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어떤 보조금이든, 어떤 혜택이든,
합리성이나 공평성과 무관하게 이를 없애는 경우 그 수혜자들은 저항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기득권의 정의이자 본질이다. 기득권의 크기와 수혜자의 수는 반비례한다.
심지어 기득권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작은 혜택이 파급의 범위에서는 가장 크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되돌리기 어렵고, 그래서 위험하다.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길게 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민란이나
혁명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역사책을 보시라, 간단히는 Wikipedia 영문판을 보시라.
나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다. 비록 오늘 퇴보를 목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20.2.7
최원영
2020년 1월 29일 수요일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부족주의(tribalism)”라는
근래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그 단어가 최근에 유행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읽은 50년도 지난 몇몇 책에서 그 단어를 봤다. 아마도 당시엔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거나, 내가 기억을 못 하거나
달리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글의 제목에는 말장난이 있다. ‘한’은 하나의 의미도 있고, ‘한(韓)’민족의 의미도 있다. 이 글은 최근 만난 옛 직장 상사와의 대화
중 갑자기 기억난, 그러나 당시 말하지 못한, 내 과거 에피소드의
나름 재해석이다. 이 글은 박OO 그 분을 위해, 그 분께 못 한 말을 쓴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다니던 학교에 일본 어떤 대학의 교수가 교환교수로 강의했다. 당시는
이른바 “일본 때리기” 시절이 막 지나간, 1990년대이다. 일본에서
1990년대는 흔히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우지만 이는 아마도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의 명칭이고, 당시
내가 느낀 바로는 일본인들은 자국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교수는 국수주의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히 더 했다. 그 교수의 이름이 이 글의 핵심인 관계로 그 분 성을 실명으로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점은 그 분께 미안하다. 그 교수의 이름은 야하기(矢作)이다 (성이고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한다).
야하기 교수는 자신의 제자 석사학위 논문 두 개를 교재로 배포하여 사용했다. 영문판이었는데, 원본이 영어인지 일어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첫 쪽 하단에 지도교수 이름이 있었다. 한 논문에는 교수의 이름을 야사쿠(Yasaku), 다른 논문에는
야하기(Yahagi)로 표기하였다. 나는 지도교수 이름도
모르는 제자들도 이상했고, 자기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 교수도 이상했다. 강의 내용은 한마디로 ‘일본최고’
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수의 태도 때문에 상당히 수동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으나, 수업내용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강의 마지막 날 질문 있냐고 하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이
교제로 주신 제자분들 논문에 하나는 교수님 성함이 야사쿠, 다른 하나는 야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 예상대로 교수는 매우 당황하면서 장황하게
변명했다. 요는 “일본어에서 한자는 음독(音讀), 훈독(訓讀)이 있는데, 한 학생은 음독으로 다른 학생은 훈독으로 내 이름을 표기했다.” (나는 바로 위에 언급한 교수와 제자간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질문을 위해서 꾹 참았다.)
이어진 내 질문: “일본에서 교수님 성함 야하기(矢作)의 하기(作)가 하기로 훈독(訓讀)되는
다른 경우가 이름 외에 있습니까?”
교수: “없는 것 같다.”
나: “근데 한국어로는 완전 말 된다. 한자 ‘作’의 뜻은 한국어로
‘한다’는 뜻이고, 명사형은
‘하기’이다. 잘
아시겠지만 일본 이름에 한국어 발음에 의한 표기 많고, 교수님 성도 그럴 가능성 많다. 교수님은 아마 한국 도래인의 후손일 가능성 많습니다.”
교수: “그럴 수 도……”
교수는 황망히 교실을 떠났고, 학생들은 소리 없는 박수나 엄지 척
등 여러 제스쳐로 나에게 응원 내지 지지를 표현했다.
야하기 교수의 강의는 한마디로 ‘일본최고’가 그 내용이었다. 그의 쇼비니스트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었고
특히 한국에 대해 말할 때는 ‘무시’ 내지 ‘경멸’의 느낌이라 한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거부감이 있었다. 한국을 콕 꼬집어 거의 ‘인종주의적’으로 경멸했던 교수가 자신 스스로가 한국인 후손일 거라는 내 ‘이론’으로 교실에서의 망신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교수의 반응으로 볼 때, 교수는 그때까지 절대로 자신이 한국계 후손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고 생각한다. 부언하자면, 쇼비니즘은 전체주의이고, 인종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두에 말한 부족주의다.
야하기 교수의 이름처럼 일본어에는 일본인도 전혀 모르는 이상한 단어나 표현들이 있다. 일본 씨름인 스모에서 자주 듣게 되는 “타가라 타가!” 혹은 “핫기요이!” 등도
그렇고, 일왕(천황) 행차나
축제(마쓰리) 시 듣게 되는 “왓쇼이” 등이 그렇다. 일본인들에게
이들 ‘정체불명의 단어’는 상당 부분이 한국말이다. 내가 예를 든 표현은 각기 ‘다가서라!’, ‘(공격)해라!’, ‘(귀인이) 왔소’ 뜻이다. (일본
스모는 함경도 씨름과 매우 흡사하고, 이들 표현 역시 함경 사투리 흔적이 있다. “왔쇼이”의 경우, 백제와
연관 있고, 전라 내지 충청 사투리의 흔적이 있다.)
짧은 이 글의 결론을 몇 개의 질문으로 대신한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야하기 교수의 전체주의 및 부족주의는 그 개인의 문제일까?
한(하나의 뜻, 야하기
교수의 일본) 부족이 한(한국의 韓) 부족을 경멸한 결과가 자기부정이라면, 그리고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과 자기합리화의 습성을 갖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무식’ 말고
어떤 말로 이런 자기부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서 목도하는 반일주의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야하기 교수보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야하기
교수의 이런 희비극(tragicomedy)적인 오류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색이 교수가 이런 언행을 하는데, 학생들을 이런 선생들로부터 어떻게
보호 내지 격리시켜야 하는가? 이런 교수를 어떻게 해야 대오각성하게 해서 이성의 진영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까?
이 글 제목의 말장난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한(일본, 알고 보니 韓) 부족이 한(韓) 부족에게” 한 말은 결국 자기부정이고 모순이었다. 모순은 ‘한’에 있지
않고 ‘부족’에 있음은 명백하다 (명백하지 않다면 그건 이 글이 부실해서이다). 부족의 반대말은 여기서는
‘개인’이다. 만약
‘한 개인이 한 개인에게’ 한 말이었다면 내용도 수용도 결과도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야하기 교수의 희비극적 문제는 자신의 언행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 ‘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일월의 마지막 날
최원영
2019년 12월 4일 수요일
동아일보에 난 제 글(같은 바넷 교수의 글)
오늘 동아일보에 “블루오션은 환상… ‘붉은 여왕’처럼 끝없이 경쟁하라”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http://www.donga.com/news/Main/article/all/20191204/98666048/1
제 글과 최소한 일맥상통합니다. [블루오션, 레드오션, 황당오션] http://cephalocide.blogspot.com/2012/06/blog-post.html
오래된 글이고, 이 글을 쓴 2012년에도 한 물 간 주제였지만, 굳이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면, '요설로 흥한자 요설로 망한다' 정도 아닐까요?
2019-12-5
최원영
제 글과 최소한 일맥상통합니다. [블루오션, 레드오션, 황당오션] http://cephalocide.blogspot.com/2012/06/blog-post.html
오래된 글이고, 이 글을 쓴 2012년에도 한 물 간 주제였지만, 굳이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면, '요설로 흥한자 요설로 망한다' 정도 아닐까요?
2019-12-5
최원영
2019년 11월 2일 토요일
다시 읽는 [노예의 길] Friedrich A. Hayek
약 30년전에 이 책을 읽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혼란을 목도하면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바 “강남좌파”의 정체와 위험성을 알고 싶었고, 이 글을 볼 몇 안 될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이다. 이 책을 다시 보고 나서 (갑자기) 든 생각은 “강남좌파”가
좌파의 특이한 부류가 아니라 좌파는 ‘강남화’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본문만 326 페이지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편이다. 이 책은 2차대전중인 1940-1943년 저술되어, 초판은 1944년에 출판되었다. 나치 정리와 종전 이후 올바른 이념 제시를
제때 하기 위해 책의 구성이나 내용도 최대한 간략하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참고로 저자 하이예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이다. 이 책은 많은 논란과
분노를 야기했다. (p.34) 내 짐작으로는 정의를 독점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나치즘과 마찬가지라 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비난한 당시 저명한 철학자도 “물론 읽지 않았다”(p.34)고 말했듯, 이념의 관점에서 흑백논리의 대상이 되어 읽을 필요도 없는 ‘나쁜
책’이 되었다. 아마도 이 책은 한국의 이른바 좌파가 가장
싫어하는 책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도 많은 비판과 폄훼를 들었으나,
그들도 이 책을 “물론 읽지 않았다”.
무엇이 왜 노예의 길인지 밝히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은 사회주의다. 현대에는
사회주의가 너무 많은 뜻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사회주의자”(p.44)라
할 정도이다. 복지국가, 진보주의, 전체주의, 계획경제, 공산주의, 보호주의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관행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사회주의라 칭하기 때문에 분명히 정의를 내리고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세금와 국가기관을 통해 광범위한 소득재분배(p.36)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중앙계획경제(p.36)를
의미한다. 사회주의의 반대편에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경쟁체제, 시장주의가 있다.
사회주의자는 반대진영의 핵심가치인 자유의 의미를 교묘히 바꾸어 “새로운
자유”, “경제적 자유”(p.70)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 말들은 경제적 평등을 의미한다. 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는 광범위한
소득재분배, 궁극적으로는 생산의 통제(p.159)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정반대의 체제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모든 소비, 생산, 직업 등에 관한 모든 개인의 의사결정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목적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p.115) 사회의 노력을 특정한 사회적 목표를 향하도록 의도된 조직의 존재가 모든 집단주의 체제의 공통점이다. (p.111) “경제적 자유”라는 일견 사소하고 선의의 의미조작이
광범위한 소득재분배와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노예의 길”로
귀결된다. 저자가 두려워하는 것도 이러한 순진한 선의가 히틀러나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로 연결됨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는 기술의 변화로 경쟁이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독점이 나타나며
(p.94), 경쟁체제는 “독점자본주의”로 귀결된다고
한다. (p.98) 역사적으로 볼 때, 독점은 자본주의의
필연이 아니라 예외이다. 독점이 나타난 경우에도 법적 규제와 정부의 통제로 독점의 효과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수준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자본의 독점을 국가의 독점으로 바꾸자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의 독점은 러시아 올리가키에서 보듯 자본주의의 독점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해롭다.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에서는 일견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관리자(계획주의경제의 계획자)가 없을 수 없고, 이들은 잘해야 관료 혹은 임명직 독점자본가가 된다. 이들은 공히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 (pp.179-193)
사회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법치국가’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치의 핵심은 사전에 알려지고 확정된
규범에 따라 국가가 운영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주관적 이념으로 배분적 정의를 직접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법치의 파괴를 초래한다. (p.141) “법의 사회화”(p.142)는
법치를 파괴한다. 법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주관성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관료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통제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자기편에만 눈 뜨고 있는 인간에 의한
인치일 뿐이다.
경쟁의 본질은 동일한 조건으로 모든 이가 모든 활동에 참가할 수 있으며, 공개적
혹은 은폐된 힘으로 이런 참가를 제한하는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도 관용하지 않는 법의 존재이다. (p.85) 경쟁체제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에서는 따라서 법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법치 없이는 경쟁체제(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전제)는 있을 수 없다.
국가가 특히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개인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원리이며, 자유의지 없는 인간은 노예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다른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이 글은 거의 책 제목을 설명하는 수준에서 개요만 소개하였다.
한국의 최근 상황에 시사점이 있는 내용을 추가로 간단히 소개한다.
사회주의는 개인이 변덕스럽고 무책임하다고 보며, 의회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무능하다고 본다. (p p.111-125): 히틀러의 예에서 보듯 사회주의를 선택한 선거는 마지막 선거가
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잃는 것을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교체로 인식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격렬하게 저항한다.
계획경제의 지도부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가축으로 취급 (p.69): 이는
개인을 인간으로서 존중(p.56)하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반대의 결과이다.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해야 하다”는
발언과 같다. 같은 사람이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된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자유가 아니라)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주장하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경멸한다. 이런 말,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라 보면 틀리지 않을 겄이다. 사회주의자에겐 상호 모순되고 배타적인 개념과 상황도
언어의 오용과 말장난(p.227)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로 만들 수 있다.
“노동자귀족” (p.189), “정장
넥타이 프롤레타리아” (p.190): 사회주의가 특정 세력을 편애한다는 저자의 지적이다. 민노총 등 일부 귀족노조 등장의 예언 같다. 사회주의의 지도부가
이른바 “강남좌파”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우적개념 (p.219), 관용은 …
전체주의 국가의 탄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pp.56-57): 사회주의가 반민주적이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사회주의는 일단 우리편과 네편으로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게는
전혀 관용이 없다. 전상인 서울대 화경대학원 사회학 교수, 박용진
민주당 국회의원, 박형준 동아대 교수 (전 MB 정무수석) 등이 한국사회의 전체주의화 경향을 지적한 것도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끝으로, 책에는 없지만 저자의 생각을 빌어 문재인 대선후보 수락연설문의
유명한 구절을 살펴보았다. 원문을 인용하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2] 기회의
평등은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이다. 위에 썼지만 사회주의는 “경제적
자유”라는 말장난으로 기회가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는
그들의 정의를 개인의 자유에 우선시 한다. 따라서 “정의로운
기회”를 주장한다. 문재인 후보의 말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다시 쓰면, “기회는 정의, 결과는 평등” 이렇게 된다. 결과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정부에 의해 강제된 것으로, 강제된 것이므로 노예적[3] 이다. 마지막으로, 과정은
위에 쓴 대로 사회주의의 속성상 법치가 아닌 인치가 불가피하기에 자의적이고 편향적이다. 문재인 후보의
구절을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쓰면: “기회는 우리의 정의대로, 과정은
우리 방식으로, 결과는 강제적(노예적)”.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새로
쓴 그의 연설문 구절이 오늘의 실상을 원문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는 사회주의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문재인 후보의 연설문을 찾아보았는데, 다른 부분에서도 달리 해석할 부분이 많아 연설문에 대해 별도의
글을 쓸까 생각 중이다.
조국 씨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했다. 모두에 썼듯, 사회주의는 많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에 그 중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하이예크의 사회주의자이지만, 그의 말은 북유럽
사회주의로 들어주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씨 같은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도 하이예크의 사회주의자이다. 말장난 하는
조국 씨와 침묵하는 문재인 대통령, 내가 보기엔 난형난제다.
2019.11.03
최원영
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하마(河馬)와 흑연(黑鉛)
하마는 영어로 Hippopotamus입니다. 그리스어 어원인데 hippo는 말, potamus는 강이라는 뜻이니 한자로 河馬가 됩니다. 하마는 돼지처럼 보이지만 말과 입니다. 한자로 河馬라 쓰는 것은 아마도 그리스어 이름을 번역한 것 아닌가 합니다. 중국에 하마가 없으니 그리스어 이름을 번역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연필심은 영어로 lead (한국어로는 납) 입니다. 흑연은 탄소입니다. 영어로는 graphite 혹은 black lead 입니다. 왜 연필심 내지 흑연을 lead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연필 혹은 연필심을 납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납은 유해하고, 기능도 떨어지고, 무었보다 비싸기 때문입니다. 鉛筆 내지 黑鉛 이라는 단어가 중국과 서양에서 같은 의미인 것은 河馬의 경우와 달리 여러가지로 이상합니다. 중국에서도 연필은 있었을 것 같고 따라서 중국식 이름이 애초에 달리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연필이라는 단어가 영어의 번역이 아니라 원래 중국식 이름이라면 이는 기막힌 우연입니다. 중국과 서양이 공히 연필 내지 흑연의 속성을 잘 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식 이름이 서양식 이름으로 대체 돼었거나 번역 돼었다 해도 (중국어와 영어 어떤 방향이든) 잘못된 명칭이 명백한데 왜 이렇게 대체나 번역을 했을지 이해가 안 갑니다. 광석 상태에서는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지만 흑연을 보고 납이라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결론은 河馬와 黑鉛은 단어 조어와 번역 품질의 양극단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연필심은 영어로 lead (한국어로는 납) 입니다. 흑연은 탄소입니다. 영어로는 graphite 혹은 black lead 입니다. 왜 연필심 내지 흑연을 lead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연필 혹은 연필심을 납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납은 유해하고, 기능도 떨어지고, 무었보다 비싸기 때문입니다. 鉛筆 내지 黑鉛 이라는 단어가 중국과 서양에서 같은 의미인 것은 河馬의 경우와 달리 여러가지로 이상합니다. 중국에서도 연필은 있었을 것 같고 따라서 중국식 이름이 애초에 달리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연필이라는 단어가 영어의 번역이 아니라 원래 중국식 이름이라면 이는 기막힌 우연입니다. 중국과 서양이 공히 연필 내지 흑연의 속성을 잘 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식 이름이 서양식 이름으로 대체 돼었거나 번역 돼었다 해도 (중국어와 영어 어떤 방향이든) 잘못된 명칭이 명백한데 왜 이렇게 대체나 번역을 했을지 이해가 안 갑니다. 광석 상태에서는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지만 흑연을 보고 납이라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결론은 河馬와 黑鉛은 단어 조어와 번역 품질의 양극단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10원 동전과 10만원 수표 없애야
며칠전 10만원권 수표 결제금액이 전년 대비 24%, 5만원권 지폐 발행전인 2009년 상반기 대비 85% 급감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05/2017100500918.html) 5만원권이 처음 나왔을 때 혹은 10만원권 발행이 필요하다고 할 때 반대하던 측에서는 "과소비를 조장한다" 등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10만원권 수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의 기사에 올해 상반기 10만원권 수표 결제금액이 하루 평균 470억이라 합니다. 매수로는 하루 47만장입니다. 수표의 문제는 1회용이고, 마이크로 필름 촬영 등 처리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은행에서 수표 결제시 수수료를 청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부담하든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부정한 돈이 오갈 때 편해진 점은 분명 있으나, 극소수의 경우일 것이고 이를 고액권 발행을 기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거나 "과소비"를 자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고액권의 사회적 효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몇년전에는 10원 주화를 녹여 청동으로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10원 주화의 크기와 무게를 크게 줄였습니다. 요새는 1원 동전은 유통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원단위는 절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10원 동전도 없앨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캐나다의 경우 우리 10원과 비슷한 금액인 센트를 없앨 때는 절사가 아니라 5센트 단위로 반올림을 했습니다. 1-2센트는 0, 3-7센트는 5, 8-9센트는 10센트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매번 거래에서 반올림에 의한 손익은 센트 단위가 0-9센트까지 (0, -1, -2, 2, 1, 0, -1, -2, 2, 1)이 됩니다. 합하면 0이 되는데, 평균이 0이 된다는 겁니다. 물건 가격 등의 센트 단위를 의도적으로 반올림에 유리하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거래가 충분히 반복되면 통계적으로 누구도 이익이나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1년에 1달러 (원화로 대략 1,000원) 즉 100센트의 이익이나 손해를 볼 확률은 0입니다. 보통 쓰는 4사5입 방식으로 반올림을 하면 약간 문제가 생깁니다. 반올림에 의한 손익은 센트 단위가 0-9센트에서 (0, -1, -2, -3, -4, 5, 4, 3, 2, 1)이 되어 평균값은 5가 됩니다. 손익이 분명 어느 한편으로 편중되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10만원권 수표의 경우에는 결국 소비자가 외면해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10만원권 지폐도 발행되어야 합니다. 10원 단위는 50원 단위로 반올림해서 10원 동전 없애야 합니다. 분명히 사회적 효익이 있음에도 왜 못 하는지, 왜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몇년전에는 10원 주화를 녹여 청동으로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10원 주화의 크기와 무게를 크게 줄였습니다. 요새는 1원 동전은 유통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원단위는 절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10원 동전도 없앨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캐나다의 경우 우리 10원과 비슷한 금액인 센트를 없앨 때는 절사가 아니라 5센트 단위로 반올림을 했습니다. 1-2센트는 0, 3-7센트는 5, 8-9센트는 10센트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매번 거래에서 반올림에 의한 손익은 센트 단위가 0-9센트까지 (0, -1, -2, 2, 1, 0, -1, -2, 2, 1)이 됩니다. 합하면 0이 되는데, 평균이 0이 된다는 겁니다. 물건 가격 등의 센트 단위를 의도적으로 반올림에 유리하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거래가 충분히 반복되면 통계적으로 누구도 이익이나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1년에 1달러 (원화로 대략 1,000원) 즉 100센트의 이익이나 손해를 볼 확률은 0입니다. 보통 쓰는 4사5입 방식으로 반올림을 하면 약간 문제가 생깁니다. 반올림에 의한 손익은 센트 단위가 0-9센트에서 (0, -1, -2, -3, -4, 5, 4, 3, 2, 1)이 되어 평균값은 5가 됩니다. 손익이 분명 어느 한편으로 편중되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10만원권 수표의 경우에는 결국 소비자가 외면해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10만원권 지폐도 발행되어야 합니다. 10원 단위는 50원 단위로 반올림해서 10원 동전 없애야 합니다. 분명히 사회적 효익이 있음에도 왜 못 하는지, 왜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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