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9일 수요일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부족주의(tribalism)”라는 근래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그 단어가 최근에 유행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읽은 50년도 지난 몇몇 책에서 그 단어를 봤다. 아마도 당시엔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거나, 내가 기억을 못 하거나 달리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글의 제목에는 말장난이 있다. ‘은 하나의 의미도 있고, ‘()’민족의 의미도 있다. 이 글은 최근 만난 옛 직장 상사와의 대화 중 갑자기 기억난, 그러나 당시 말하지 못한, 내 과거 에피소드의 나름 재해석이다. 이 글은 박OO 그 분을 위해, 그 분께 못 한 말을 쓴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다니던 학교에 일본 어떤 대학의 교수가 교환교수로 강의했다. 당시는 이른바 일본 때리기시절이 막 지나간, 1990년대이다. 일본에서 1990년대는 흔히 잃어버린 10으로 불리우지만 이는 아마도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의 명칭이고, 당시 내가 느낀 바로는 일본인들은 자국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교수는 국수주의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히 더 했다. 그 교수의 이름이 이 글의 핵심인 관계로 그 분 성을 실명으로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점은 그 분께 미안하다. 그 교수의 이름은 야하기(矢作)이다 (성이고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한다).

야하기 교수는 자신의 제자 석사학위 논문 두 개를 교재로 배포하여 사용했다. 영문판이었는데, 원본이 영어인지 일어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첫 쪽 하단에 지도교수 이름이 있었다. 한 논문에는 교수의 이름을 야사쿠(Yasaku), 다른 논문에는 야하기(Yahagi)로 표기하였다. 나는 지도교수 이름도 모르는 제자들도 이상했고, 자기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 교수도 이상했다. 강의 내용은 한마디로 일본최고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수의 태도 때문에 상당히 수동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으나, 수업내용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강의 마지막 날 질문 있냐고 하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이 교제로 주신 제자분들 논문에 하나는 교수님 성함이 야사쿠, 다른 하나는 야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 예상대로 교수는 매우 당황하면서 장황하게 변명했다. 요는 일본어에서 한자는 음독(音讀), 훈독(訓讀)이 있는데, 한 학생은 음독으로 다른 학생은 훈독으로 내 이름을 표기했다.” (나는 바로 위에 언급한 교수와 제자간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질문을 위해서 꾹 참았다.)

이어진 내 질문: “일본에서 교수님 성함 야하기(矢作)의 하기()가 하기로 훈독(訓讀)되는 다른 경우가 이름 외에 있습니까?”
교수: “없는 것 같다.”
: “근데 한국어로는 완전 말 된다. 한자 의 뜻은 한국어로 한다는 뜻이고, 명사형은 하기이다. 잘 아시겠지만 일본 이름에 한국어 발음에 의한 표기 많고, 교수님 성도 그럴 가능성 많다. 교수님은 아마 한국 도래인의 후손일 가능성 많습니다.”
교수: “그럴 수 도……”
교수는 황망히 교실을 떠났고, 학생들은 소리 없는 박수나 엄지 척 등 여러 제스쳐로 나에게 응원 내지 지지를 표현했다.

야하기 교수의 강의는 한마디로 일본최고가 그 내용이었다. 그의 쇼비니스트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었고 특히 한국에 대해 말할 때는 무시내지 경멸의 느낌이라 한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거부감이 있었다. 한국을 콕 꼬집어 거의 인종주의적으로 경멸했던 교수가 자신 스스로가 한국인 후손일 거라는 내 이론으로 교실에서의 망신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교수의 반응으로 볼 때, 교수는 그때까지 절대로 자신이 한국계 후손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고 생각한다. 부언하자면, 쇼비니즘은 전체주의이고, 인종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두에 말한 부족주의다.

야하기 교수의 이름처럼 일본어에는 일본인도 전혀 모르는 이상한 단어나 표현들이 있다. 일본 씨름인 스모에서 자주 듣게 되는 타가라 타가!” 혹은 핫기요이!” 등도 그렇고, 일왕(천황) 행차나 축제(마쓰리) 시 듣게 되는 왓쇼이등이 그렇다. 일본인들에게 이들 정체불명의 단어는 상당 부분이 한국말이다. 내가 예를 든 표현은 각기 다가서라!’, ‘(공격)해라!’, ‘(귀인이) 왔소뜻이다. (일본 스모는 함경도 씨름과 매우 흡사하고, 이들 표현 역시 함경 사투리 흔적이 있다. “왔쇼이의 경우, 백제와 연관 있고, 전라 내지 충청 사투리의 흔적이 있다.)

짧은 이 글의 결론을 몇 개의 질문으로 대신한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야하기 교수의 전체주의 및 부족주의는 그 개인의 문제일까?
(하나의 뜻, 야하기 교수의 일본) 부족이 한(한국의 韓) 부족을 경멸한 결과가 자기부정이라면, 그리고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과 자기합리화의 습성을 갖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무식말고 어떤 말로 이런 자기부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서 목도하는 반일주의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야하기 교수보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야하기 교수의 이런 희비극(tragicomedy)적인 오류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색이 교수가 이런 언행을 하는데, 학생들을 이런 선생들로부터 어떻게 보호 내지 격리시켜야 하는가? 이런 교수를 어떻게 해야 대오각성하게 해서 이성의 진영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까?

이 글 제목의 말장난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일본, 알고 보니 韓) 부족이 한() 부족에게한 말은 결국 자기부정이고 모순이었다. 모순은 에 있지 않고 부족에 있음은 명백하다 (명백하지 않다면 그건 이 글이 부실해서이다). 부족의 반대말은 여기서는 개인이다. 만약 한 개인이 한 개인에게한 말이었다면 내용도 수용도 결과도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야하기 교수의 희비극적 문제는 자신의 언행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 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일월의 마지막 날
최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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