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의 책임
최근 미중 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중국 내지 중국민과 중국공산당을 분리 대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중국공산당이 국제관계에서 문제이며, 국가의 이익보다는 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중국민은 중국공산당의 피해자이기에, 중국민이
이를 깨닫게 해서 내부적인 저항을 유도하려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일본의 경우, 부모의 선거구를 이어받아 의원이 되는 이른바 “세습의원”이
당연시되고 있다. 세습의원의 수도 많고, 영향력도 크기 때문에
세습의원이 아닌 의원들은 “흙수저” 혹은 “자수성가” 의원으로 불릴 정도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권과 주민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 맞는
말이다. 일반 주민에게 북한 김씨 왕조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민주적 절차가 보장되어 있지만,
세습의원을 선출한다면 이는 현재 유권자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나치는 선거로 권력을 잡았다. 이후 히틀러 몰락 때까지 선거는 없었거나
형식적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도 위험하다. 트럼프의 당선도
충격적이었지만, 아직도 상당한 지지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민주주의의 대표라고 할 미국에
대한 실망과 우려가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트럼프의 지지율이 바이든을 앞선다는 보도[2]까지
있었다. 일본에서는 며칠 전 기시다 후미오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4일 제100대 총리에 취임한다. 미국과 일본의
현재 정치상황은 현재 유권자의 책임이다. 선거제도는 다르지만 유권자의 의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모든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다. 한국전 초기 북한군에
부역한 것을 죄로 물을 수는 없다. 총구 앞에서 논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군국주의를 일본 유권자의 책임이라 하긴 어렵다. 의지도, 힘도, 권한도, 선택도
없다면, 책임을 묻긴 어렵다. 유권자는, 정의에 의해, 민주주의를 전제로 한다. 이는 시대와 정치체제에 따라 정통성의 원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시민” 계급에 한정되며, 노예의 존재가 없었다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왕정 시대에는
왕위계승권이 정통성의 원천이 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화는 결국 왕위계승권의 정통성에 대한 투쟁이었으며, 오늘날 북한이 “백두혈통”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은 절대왕정 체제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나 오늘날 북한의 공산당원은 민주주의 사회의 유권자에 해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유권자의 책임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다 보니 애매한 점도 많다. 불행히도
역사는 가끔 퇴보하기도 해서, 과거에는 유권자였으나 이후 아니게 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유권자의 책임을 현재의 관점에서 따질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목숨은 누구에게나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이는 기본전제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 일반인이 권력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정한 불이익 걱정으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유권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최근 미얀마의 경우 목숨 걸고 쿠데타 군부에 투쟁하는 국민들이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도 그랬다. 여기서는 그런 영웅이 아니라 소시민인 유권자를 전제로, 오늘날 유권자의 책임을 고민해보려고 한다.
일단 독일과 일본을 먼저 비교한다. 일본은 후세대가 사과할 일은 없게
하겠다고 한다. 독일은 매년,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치 과거에
대해 사과한다. 사과하는 독일인들이 나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책임이 있는 전범들은 대부분 사법적인 판단을 받았다. 일본의 경우
태평양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1940년에 30세는 되어야
하니 지금 생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범국에 대한 자신
혹은 후세대의 책임을 부정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고 해도 전범국을 부정하는 것은 현세대의 행위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있다. 전범국을 부정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은
현재 유권자의 책임이다.
2000년대 동구권의 이른바 “색깔혁명”, 2011년 중동의 민주화 운동, 2010년대 홍콩 민주화 운동
등은 대부분 과거로 회귀하였다. 냉정히 말하면 이들은 ‘21세기
실패한 민주화 운동’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5년 직선제 민주화 운동, 2016년 “촛불혁명” 등의
민주화 운동은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는 결과를 만들었다. 3.1운동 등 한국은 거의 무모할 정도로
보이는 저항도 용감하게, 그리고 전국민적으로 벌였고, 단기적으로는
실패라 할 수 있는 것도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모두 성공한 것이며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다.
중국의 경우 1989년 “천안문
광장 저항시위”는 유혈진압 되었다. 희생자 수는 출처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천명 정도는 될 것이다. 오늘의 중국을 보면,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중공 당국의
세뇌작전이 성공했는지 현재 중국은 “중화민족주의”가 판치고
있으며, 시진핑은 모택동2가 되었다. 인민의 삶이 어떻게 되든 모택동 시절이 등소평 시절보다 체제 보장에 있어서는 더 낫다는 판단인 듯 하다. 이런 역사역행은 결국 중국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체제에 의한 유권자 세뇌의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로 대변되는 기막힌 현실은 좌절과 우려이다. 다른 문제를 다 떠나, “무식한 백인들”에게 의회를 점령하도록 선동했다. 미 공화당은 아직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많고, 앞서의 보도처럼 현 바이든 대통령보다 지지한다는 여론조사도 있으며, 트럼프는 다음 대선을 노리고 있다. 링컨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고려하면, 향후 전개되는
모든 상황은 유권자의 책임이다.
일본의 경우, 민주적 절차가 확립된 국가이다. 문화적 특징이든, “무식한 극우”
영향이든, 일본의 정치가 향후에도 지금과 같다면, 이는
유권자의 책임이다.
한국의 경우, 종북, 친중
등 현재 집권세력이 선거에서 계속 집권한다면, 이 역시 유권자의 책임이다. 정치공작은 항상 존재해 왔다. 내년 대선에서도 온갖 정치공작이 난무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것은 전적으로 유권자의
책임이다. 한국은 민주적 절차가 확립되어 있고, 앞서 언급했듯, 민주화 투쟁에 있어서 여러 번 성공했다. 미국의 무식한 국민도 없고, 중국의 세뇌도 없고, 일본의 복종적 문화도 없다. 따라서 모든 선거의 결과는 오롯이 유권자의 책임이다.
2021.10.1
최원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