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작가의 가벼움
최원영 2016-05-31
이 글의 제목이 말하는 작가는 스페인의 변호사 겸 소설가 일데폰소 팔코네스이다. 이 글의 제목은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패러디 한 것으로 내용면에서는 이 소설 및 동명의 영화와 아무 관계 없으며, 이 글은 순전히 소설가 팔코네스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팔코네스는 [바다의 성당][1],
[파티마의 손], [맨발의 여왕][2]
등 3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바다의 성당]은 14세기 한 농노의 아들의 일생이 완전 編年體로 서술되어 있다. 2006년 초판이 발간되었고, 2009년판 표지에는 "세계적 베스트셀러"라고 써 있고 바로 뒷장에는 400만부 이상 팔렸다고 써 있다. 한국어판도 있다. 이 책의 맨 뒤에는 2009년 출판된 [파티마의 손]에 대한 소개가 있는데 16세기 스페인에서의 무슬림 소년이 기독교 사회에서 겪는 이야기라 한다. [맨발의 여왕]은 2013년 출판되었고, 18세기 집시의 생활에 대한 소설이다. 출판 년도만 보면 3-4년에 한 권씩 출판하는 셈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팔코네스는 [바다의 성당]을 4년여에 걸쳐 썼다고 한다.[3]
팔코네스는 결국 역사소설 전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 변호사란 본연의 직업이 있는 상태에서 3-4년의 시간은 특히 역사소설에 있어서는 조금은 부족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바다의 성당]과 [맨발의 여왕]을 읽었고, 이 두 소설에서 느낀 작가의 문제점들을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시대착오
[바다의 성당]에는 콘돔(capuchón)이 나온다 (p.271). 인물과 시대배경을 고려하면 소설 속 콘돔의 사용 모습은 18세기의 모습이니 약 400년의 차이가 있다. [맨발의 여왕]에는 환등기가 나온다 (pp. 564-565). 최초의 유리판 사진이 1839년에 등장했고[4], 환등기는 사진을 전제로 하므로 그 보다 더 뒤에 발명되었을 것이다. 소설 속 시점보다 100년 정도 뒤의 일이다. 아이스크림도 나온다 (p. 91). 감옥의 죄수들은 요강의 오물을 창문을 통해 길거리에 버린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이미 정화조가 있던 시대로 소설 속에서도 나온다 (p. 579).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감옥과 같은 공공기관에 정화조가 없거나 창문으로 오물을 버리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심지어 심폐소생술도 등장하는데 (p. 719), 이는 19-20세기의 일이다.[5]
지참금 관습에 관해서는 정반대의 서술이 있다. [바다의 성당]에서 한편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것으로 (p. 244), 한편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것으로 (pp. 247, 429) 나온다. 244쪽과 247쪽은 실제로는 바로 다음 쪽이다. 팔코네스가 실수를 한 것인지 무신경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시대착오보다 더 불성실하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런 류의 오류나 왜곡은 책의 내용과 작가의 성실성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사건과 당시의 시대상황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오늘의 문제를 이해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이며,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6]라고 한 E. H. Car의 유명한 문장도 같은 맥락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왜곡되면 이미 역사소설이 아니다.
위에 예를 든 콘돔이나 오물 투척은 실수라기 보다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실수라면 작가의 태만, 의도라면 작가의 기만이고, 어떤 경우든 소설과 작가 전반에 관하여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래에 거론하는 문제들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의구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 비상식
[바다의 성당]에서는 영주가 농노에 대해서 결혼식 날 신부를 강간할 권리를 주는 관습법이 있다고 한다. (pp. 22, 28-29)
[맨발의 여왕]에서는 부유한 여인들이 몸매 유지를 위해 유아에게 젖을 안 먹이고 유모를 쓰는 "유방의 허영"(p. 423)을 말한다. 유모는 이들 유아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데 움직이지 못 하도록 포대기에 꽁꽁 싸두고 키우는 관계로 불구나 기형이 유발되기도 한다고 한다. (pp. 569-570) 담배를 밀거래 하는 장면은 (pp. 137-140) 실소를 자아낸다. 매도자는 여러 종류의 담배 포대를 무작위로 늘어놓고 다수의 매수자는 나름 선별해서 가져간다. 이 과정은 완전한 혼란이고 그 와중에 남의 것을 훔치는 상황도 소설 속에 나온다. 이런 혼란에서 거래대금은 어떻게 수수하는지 팔코네스는 생각이라도 해봤는지 모르겠다. 어떠한 경우에도 상거래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내 상식과 경험으로는 없다.
비상식의 극단은 멜초르가 위 담배 밀거래에서 도둑질한 상대방을 찾아가 그의 돈을 훔쳐 고향으로 오는 장면으로, 살아있는 서커스 곰을 데리고 온다. 이후 이 곰은 이 소설 끝까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돈의 반은 곰이 갖고 왔다"(p. 185)라는 뭔가 의미가 있을 듯한 대사에도 불구하고.
3. 캐릭터의 일관성
[바다의 성당]의 주인공 아르나우는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이다. 종교적으로 매우 독실하고, 무한한 박애주의자이며, 요부(알레디스)를 만족시키는 변강쇠 이지만 38세부터 8년간 한번도 섹스를 안 한 강철 같은 의지의 금욕주의자이고, 만인이 존경하는 시장이자 판관이며, 숙달된 군인이자 노련한 전략가이며, 온갖 불합리한 관습법을 철폐한 혁명가이며, 노련한 사업가이자 은행가이다. 대충 링컨, 버핏, 아퀴나스, 이순신 등을 합쳤다고 보면 될 것이다. 8세까지는 산타 클로스를 믿는 순진무구한 아이였다가 (pp. 93-94) 14세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요청하는 조숙한 소년이다 (pp. 243-244). 동생 조안은 처음에는 형보다 조숙하지만 10세 즈음에는 8세 때의 형과 비슷하게 순진해진다. 다른 많은 캐릭터들이 타고난, 이유 없는 증오를 갖거나, 합리와 억측, 선량과 난폭 등 모순된 성격을 동시에 갖거나 이유 없이 변한다.[7]
[맨발의 여왕]에서는 일관성 있는 캐릭터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주인공 까리닫은 노예 출신으로 극단적으로 수동적/피동적이지만, 탁월한 사업가도 되고 (c. 40), 리더십도 갖게 되고 (c. 31),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또 다른 주인공 밀라그로스는 무모하고 변덕스럽고 반항적이다 (cc. 3, 8). 전체적으로 정숙하지만 때때로 은근한 유혹도 한다 (pp. 177, 671). 修士 호아킨은 담배 밀수도 하고, 독실하기도 하고, 밀라그로스와 결혼하기 위해 사제직을 포기하기도 하고, 바보스럽고,
수줍고,
우유부단하다.
페드로 가르시아는 최악의 인간형이지만 거의 중간까지는 성격에 대한 서술이 없고, 그 이후로는 질투, 비열, 잔인 등의 성격들이 계속 추가된다. 사전에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그때그때 스토리 전개에 따라 적당히 필요한 성격을 추가하는 듯한 느낌이다. 아내인 밀라그로스와의 관계도 금전적 착취, 아내를 팔아먹는 뚜쟁이, 죽이려는 살인자 등으로 변한다. 몇몇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캐릭터도 있으나 이들은 부수적인 인물들로, 아마도 등장이 제한된 이유로 일관성이 일견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다들 상식적으로 정상은 아니다.
4. 우연의 일치
[바다의 성당]에서 주인공은 불륜 관계의 도피 수단으로 군인이 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군인인 기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이후의 사건 전개에 있어서도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情婦 알레디스가 군인이 되려 떠난 주인공을 찾아가다 주인공의 어머니인 프란세스카를 만나게 되거나, 주인공의 아버지가 소요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이나, 동생 조안이 종교재판관이 되는 과정 등 많은 사건이 우연의 일치에 의한다.[8]
[맨발의 여왕]의 경우 주인공 멜초르는 여러 이유로 가족들(딸 아나, 손녀 밀라그로스, 연인 까리닫 등)과 여러 번 떠나 있거나 재회하게 되는데, 이들 이별과 재회가 대부분 우연의 일치이다. 딸 아나가 감옥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여러 개의 우연이 겹치는 최악의 경우이다. (cc. 47-48)
5. 지식의 허영
팔코네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바다의 성당]도 바르셀로나가 무대이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자치주에 속하며 카탈로니아語가 스페인語와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팔코네스는 카탈로니아語를 알 것으로 생각한다. [바다의 성당]에는 많은 카탈로니아語가 나온다. [맨발의 여왕]은 집시의 이야기로 집시語가 종종 등장한다. 팔코네스가 집시語를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위해서도 집시語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왜 자신도 잘 모르고 필요하지도 않은 이들 언어를 굳이 쓰는 것일까? 만약 갈리시아를 무대로 하는 소설을 쓴다면 마찬가지로 갈리시아語를 등장시킬 것인가? 등장시킬 것이라면 최소한이라도 본인이 직접 배워야 하는 게 지식인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바다의 성당]에는 14세기 봉건시대의 관습법이 틈틈이 나타난다. 이 중 일부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영주가 농노에 대해서 결혼식 날 신부를 강간할 권리를 주는 관습법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러나 스토리나 모티브와 무관한 경우에도 관습법을 거론하고 있고, 중복적으로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 관습법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들 법들이 왜 존재했고 실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연구를 했어야 하고, 이를 적절히 소설 내에서 설명했어야 한다. 그냥 던져주는 것은 소화되지 않은 지식을 과시하는 허영이라 생각한다. 팔코네스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이들 관습법이 비상식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황당하다고 생각할 많은 독자들에 대한 예의로라도 역사소설답게 역사적 맥락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팔코네스가 지적 허영으로 가득한 떠버리이지만 정작 필요할 때에는 침묵하는 위선적인 변호사로 본다.
6. 캐릭터와 작가
소설 속 캐릭터가 작가를 대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개연성 없는 사건, 대사, 행태는 일차적으로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치지만, 이차적으로는 작가의 의도와 본성을 의심케 한다. 개연성 없는 허구는 숨겨진 존재(being)를 드러내는 것이다.
[바다의 성당]의 경우에는 캐릭터의 일관성은 부족한 반면, 事必歸正, 勸善懲惡 가치관은 지나치게 분명하다. 가치의 대립이나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저자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느껴진다.
[맨발의 여왕]에는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 대사, 행동이 많다. 위에 언급한 곰의 경우나 불필요하고 "변태적인" (p. 671) 성적 표현이나 (pp. 43, 598, 612) 상황에 전혀 안 어울리는 실없는 농담 (p. 582) 등이 그렇다. 쉽게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것인지, 작가 자신이 실제로든 아니면 환상 속에서든 변태인지 의심하게 한다.
7. 개념의 조작
[맨발의 여왕] 초반에 팔코네스는 집시의 법이 스페인 법과는 별개의 것인 것처럼 서술한다. "어떤 것도 누구도 우리를 속박할 수 없다." (p. 55) 등장하는 집시들도 스페인 법을 무시하고 치외법권을 가진 듯한 행태를 보인다. 집시 대 非집시 살인사건 (c. 6), 집시 대 집시 살인사건 (cc. 15, 22) 모두 법적인 처리가 없다. 그러다 말미에는 "집시의 법은 유랑과 자유의 법이지 [유랑 집시] … 非집시와 함께 사는 겁쟁이들[정착 집시]의 것이 아니다" (p. 716), "정의의 문제로 이 땅의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등의 표현들이 나타난다. 즉, 국법이 우선이고 그 하위의 자치법으로 집시의 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소설 속 시대에도 후자의 경우가 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맨발의 여왕]은 1749년 있었던 '집시 일망타진'(Gran Redada)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국가권력에 의한 집시 탄압이 그 본질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조작으로 국가권력과 집시라는 집단간의 문제가 집시 내부의 문제로 변화된다. 방랑 집시와 정착 집시의 갈등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집시문제"(p. 743)가 심지어 바가(Vaga)와 가르시아(García) 두 가문의 문제로 축소된다.
'Orgullo'라는 단어는 집시의 태도에 관해 중요한 단어로 시종일관 나타난다. 이 단어는 '긍지', '자존심', '오만' 등의 뜻이 있다. 이 단어는 상황에 따라 다른 뜻으로 쓰이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집시들 스스로는 '긍지'의 뜻으로, 반면 非집시들은 '오만'의 뜻으로 썼다. 동일한 단어를 긍정적, 부정적 의미 양쪽으로 쓰는 것은 매우 교활한 개념의 조작이다. 나는 팔코네스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팔코네스는 개념조작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러나 독자는 헷갈리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법이나 철학은 이러한 오류를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법을 전공한 변호사가 이래서는 곤란하다.
결론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을 정리하면, 내 생각에는:
1. 두 책에서 공히 팔코네스는 못 말리는 떠버리다.
2. [바다의성당]은 독선적인 자기과시다.
3. [맨발의 여왕]은 변태적 자기모순이다.
([맨발의 여왕]은 수수께끼이다. 주제를 알 수가 없다. 집시에 대한 연민도 혐오도 찾기 어렵다. 책 끝의 著者註에서 집시의 춤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플라멩꼬도 집시의 것인지 헝가리 것인지 분명치 않다고 할 정도로 (p. 745) 집시의 문화나 전통에 대해 인색하다. 그런 말은 안 써도 되고, 이 책의 저자라면 안 써야 한다. 소설 본문만 740쪽에 이르는 집시에 관한 긴 소설 끝에 집시 사회 전통에 대한 문헌이 없다고 한다 (p. 744). 이것은 자기모순의 정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결론: '참을 수 없는 팔코네스의 가벼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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