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테레사와 게이츠 (C00)

 테레사와 게이츠 (C00)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윈도우 등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을 구매한다. (소프트웨어의 경우는 저작권을 포함해서 개별적으로 주문제작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사용권(라이센스)을 사는 것이다.[1]) 구매 포함 어떠한 거래든 돈이 오가는 경우, 가격이 결정된 것이며, 그 가격이 거래 대상물의 합의된 가치이다.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엄밀히는 다른 주체이지만, 여기서는 동의어로 취급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멜린다 게이츠 재단도 마찬가지로 게이츠와 동일하게 언급한다.) 게이츠의 가치는 결국 그의 제품에 지불하는 가격으로 경제적 가치가 정의된다. , 게이츠의 제품이 벌어들이는 돈이 게이츠의 경제적 가치이다.

 

모든 거래에는 파는 측과 사는 측이 있다. 거래의 대상이 무엇이든 거래에서 합의된 금액이 그 시점, 그 거래의 시장가치이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그 시장가치가 누구의 가치인가 하는 것이다. 나의 답은 파는 측, 즉 돈을 버는 측의 가치이다. 파는 측이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는 측이기 때문이다. 사는 측의 해당 재화나 용역의 가치는 그의 주관적인 판단이며, 구매한 재화나 용역의 효용은 따라서 구매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요약하자면, 모든 거래의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가치는 가격이고, 가격은 객관적인 재화와 용역에만 적용될 수 있기에, 거래의 가치는 파는 측이 창출하는 것이며 그 크기는 곧 가격이다.

 

이상의 짧은 논의의 결론은 가격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가치는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는 파는 쪽의 가치이지 사는 쪽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돈은 버는 사람의 가치이지 쓰는 사람의 가치가 아니다.” ([주장1])

 

테레사 수녀가 남미 마약 카르텔 두목에게서 거금의 기부금을 받아 논란이 된 적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두목의 죄악과 그 돈의 추악함을 지적했다. 테레사 수녀는 나는 그런 것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한마디로 깔끔히 정리했다. 이 거래(순전히 돈이 오갔다는 의미에서)에서 가치는 누구의 것인가? 테레사 수녀 아니면 카르텔 두목? 아마도 모두가 인정하겠지만, 이는 테레사 수녀의 가치이지 카르텔 두목의 가치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거래에 있어서 가치는 재화나 용역의 가치이며 따라서 이를 제공하는 파는 사람의 가치이지 사는 사람의 가치가 아니다. 테레사 수녀의 일화가 나의 [주장1]의 구체적 예이다. 이렇게 보면 테레사 수녀에 대한 공격은 경제학적인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게이츠는 재단을 통해 아프리카 에이즈 퇴치 등 많은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게이츠의 사회경제적 가치인지 여부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게이츠의 자선활동에 쓰인 돈은 게이츠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게이츠의 돈을 받아가는 수 많은 단체들의 사회경제적 가치이다. 게이츠 재단은 아프리카에서 에이즈(AIDS) 퇴치를 위해 많은 돈을 썼으며, 중요한 활약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게이츠 재단에서 돈을 받아간 에이즈 관련 단체의 가치이다. 에이즈 퇴치에 상대적으로 많은 돈이 몰리면서, 아프리카에서는 의사나 의료장비가 에이즈 퇴치에 집중되었고, 이는 전염병 예방이나 모자보건 등 다른 의료 영역의 인력과 장비의 부족을 초래하여 전체적으로는 더 해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재단이 쓴 돈은 완전 낭비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없느니만 못 한 해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선사업까지도 돈 쓰는 데 조심해야 하며 경제학적 원칙에 따라야 함을 보여주는 경우이다.[2]

 

다시 테레사 수녀의 경우로 돌아가, 그 거래의 대상물인 재화나 용역은 무엇인가? 자선사업은 정의에 의해 대가성이 없다. 테레사 수녀가 제공한 것은 그녀가 상징하는 선이다. 카르텔 두목의 선행은 테레사 수녀의 대의를 인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면죄부를 사려는 등의 개인적인 의도는 최소한 경제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기부는 거래의 대상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특이한 거래이고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다.

 

카르텔의 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서의 논리 그대로라면, 카르텔의 막대한 수입은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가치를 창출했고 인도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상식적으로나 감성적으로는 물론 아니다. 경제학적으로도, 다행히, 아니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수입과 이윤(이익)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수입은 속성이 무엇이든 (차입 제외)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이다. 반면 이윤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 되어야 한다. 경제학적 이윤은 일단 경쟁이 전제가 된다. 완전경쟁의 경우에는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나누면 이윤은 0이 된다. , 근로자에게는 임금을, 은행 등 대출자에게는 이자를, 지주에게는 지대를, 주주에게는 사업의 속성에 따른 위험율을 반영한 자본수익을 돌려주면 남는 게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경제학을 이해하지 못 하는 많은 이들이 완전경쟁 내지 경제학 자체를 폄훼한다. 현실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지만, 완전경쟁의 상황에서는 실제 이런 결과가 나온다. 현실에 존재하는 완전경쟁 시장은 아마도 주식시장일 것이다. 특히 선물, 옵션 등 파생상품의 경우에는 완전경쟁을 가정한 가격의 형성과 손익의 귀속이 거의 정확히 경제학 이론대로 구현된다. 이는 개별 주식에서 흔히 보는 정보의 비대칭성이나 사기성 거래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해석으로는, 카르텔의 수입은 이윤이 아니라 대부분 지대(rent)이다. 경제학에서 지대는 공급이 제한된 자원의 소유에서 발생하는 수입니다. 그렇다면 카르텔이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공급이 제한된 자원은 무엇일까? 불법행위를 자행할 수 있는 배짱이나 부패의 커넥션이다. 카르텔의 수입은 또한 독과점에 의한 초과이윤이다. 마약 카르텔의 경우 독과점은 너무나 당연하며 (안 그렇다면 그 많은 영역싸움과 살인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 사업의 본질이다. 바로 이 점에서 시장경제와 법치주의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시장경제는 경쟁을 전재로 하며, 공정하지 않은 경쟁은 정의에 의해 경쟁이 아니며, 그 공정은 법치에 의존한다. 한마디로 법치가 없으면 공정한 경쟁이 없고, 경쟁이 없으면 시장경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마약 카르텔의 수입은 지대이거나 독과점 이윤이다.

 

경제학은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가치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시장주의에는 앞서 언급했듯, 법치, 공정, 경쟁이 내재되어 있다. 경제학의 창시자인 아담 스미스나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맑스나 그들의 대표 저작에서 가치를 가장 먼저 다루었다. 현대는 가치의 혼돈 시대이다. 경제학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가치부터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1.11.12

최원영



[1] 소프트웨어와 사용권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다.

[2] 이는 결국 보조금의 문제이며,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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