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7일 월요일

기강해이: 전철 2020년 2월

전 출퇴근에 전철을 이용합니다. 지난 연말부터 오늘까지 기강해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보도가 안 될 수도 있어 직접 겪은 일 기록합니다.

작년말 경인선 및 경부선 전철 배차 조정한다고 했고, 그 결과 연초 며칠간 전철 시간표가 완전 엉망이었습니다. 시간표와 실제 배차는 완전 달랐습니다. 이전에도 배차 조정은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처음 겪었습니다.

엊그제 2/14일에는 구로역 "선로문제"로 출퇴근 시간 전철 운행이 몇시간동안 비정상이었습니다. 경인선 급행과 특급은 전부 취소되었고, 잘은 모르겠으나 일반 열차도 일부 취소된 듯 합니다.

다음날 15일에는 제가 탄 동인천 급행 전철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구로역에서 열차를 교체했습니다. 교체한 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전철문 내지 차단문 고장으로 옆 문을 이용하라는 안내방송이 2번 있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다른 문이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겪은 일이 저만 "처음 경험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불안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만 "처음"이 '불안'한 것인가요?

대한민국, 여러모로 그냥 예전 같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20.2.18
최원영

2020년 2월 6일 목요일

영혼 있는 공무원, 공무원공화국


영혼 있는 공무원, 공무원공화국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는 말이 한 때 논란이 되었다. 그 기사를 찾으려고 검색을 하려니 영혼 있는 공무원이 자동완성으로 나타났다. 이 글 제목이 그리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문구가 나타나 한편 놀라고, 한편 궁금해서 내용을 봤다. “대통령이 언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은 무슨 뜻?”[1] 제하에 문재인 대통령(이하 모든 대통령은 관행대로 성과 으로 축약)의 언급을 포함하여 여러 사실과 해석을 제시하였다. (아시아경제 2017.8.23)

거의 모든 나라 법원에서 상징으로 쓰이는 정의의 여신[2]은 눈을 가리고 있다. 최초의 썬글래스는 중국 판관들이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페르마의 정리로 유명한 페르마는 판사였고, 당시 판사의 일반인 접촉을 제한해서 취미로 수학을 공부했고, 수백 년간 풀지 못 한 수학적 난제를 만들었다.[3] 법치주의의 근본은 공평과 예측가능성임을 생각하면, 그리고 법치의 최후보루는 판사임을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가 이해가 된다.

위 아시아경제 기사에서 인용을 하면: 공직사회의영혼론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베버는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관료제는 개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문통이 2017.8.22일 언급한 정권 뜻에 맞추는공직자를 폄훼하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작자인 베버의 뜻은 오히려 법관 등 공직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라 볼 수 있다. 2020 2월 오늘로 다시 돌아오면, 문통이 원한 영혼 있는 공무원은 조국, 추미애, 기타 문통의 ()개들 아니었나 생각한다. 베버도 무덤 속에서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는 늘공((원래) 공무원)영혼 있음이 걱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103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개인적인 양심의 의미가 아니다. 판사가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면 이는 양심이 아니라 편견이다. 판사의 양심의 의미는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의 글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4]국민정서법은 법치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도 이 글에서 알 수 있다. 오늘 대한민국의 혼란은 국민정서법으로 분장한 정치공직자가 근본 원인이다. 이들 정치공직자의 문제는 정치적이라 치고,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하려는 문제는 일반 공무원의 사고방식이다. 국민을 개돼지취급하는 나향욱[5] 같은 사이코 공무원이 아니라 성실하고 선량한 일반 공무원마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제대로 이해 못 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7조 ①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몇 가지 사례로 시작한다:
S1)      얼마 전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이 5대그룹 불러 공동 신사업 아이디어 내라[6] 했다. 재계는 순간 매우 황당’, 이후 대책 마련에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S2)      최근 지인을 통해 들은 바: 정부에서 제약사들 모아놓고 구조조정을 요구 내지 통보. 상당수 소규모 제약사들은 존폐를 심각하게 우려해야 할 내용이었다고 한다.
S3)      사립대 총장들이 등록금 인상을 선언했다.[7] 자사고나 특목고 폐지 논란은 지금도 격렬하다.[8]
S4)      한국에서 인터넷 및 관련 산업이 발전한 이유는 정부부처 이름 어디에도 인터넷이 들어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확인 불가)

지금이 60-70년대도 아니고, 이른바 산업정책이란 것이 필요한지 매우 의심스럽다. 박통 시절로 대표되는 고도성장기에 대한민국은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자본을 파급효과가 큰 산업에 집중하였다. 이를 산업정책이라 흔히 부르지만 이는 국가 차원에서, 즉 거시경제 차원에서 특정 산업을 선택한 것이지 미시경제 차원인 개별 산업 내부의 기업의 의사결정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 등 거시경제정책이 정부의 일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큰 산업이라도 개별 산업은 미시경제의 영역이며 이는 정부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자본, 인적자원, 노하우 등 모든 면에서 기업이 정부의 도움이나 코치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공무원이 산업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수많은 인재보다 능력이 있을 이유는 하나도, 조금도 없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공무원은 기업 직원보다 심각하게 능력이 떨어진다.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인데 정치는 사류”, 말은 1995년의 발언이지만, 무려 25년이 지난 지금 더더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다.

정부가 특정 산업의 기업의 경영에 관여하는 ( S1, S2) 행위는 한마디로 건방이다. 고시 한두 개 붙었다고 스스로 똑똑하거나 뭘 안다고 착각하는 공무원선민의식일 뿐이다. 실무 않는 의사는 의사가 아니다. 사법고시 합격자는 사법연수원에서 또 다시 2년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고도 경험부족으로 소장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 하는 신참 변호사나, 어의 없는 실수로 의뢰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변호사의 경우도 많다. 실무 혹은 실전 경험이 있어야 지식도 비로소 體化되고 현실적용이 가능하다. 고시 과목에 반도체, 자동차, 원자력공학, 화학공학, 등등의 과목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실전경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공무원이 스스로가 민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식해서인지 용감해도 너무 용감하게, 그리고 건방지고 오만하게 민간 기업의 총수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들여 가르치려 든다. (지식과 경험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리가 회장 가르치려 드는 정도이다.)

대한민국 교육이 살려면 교육부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S4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에서 인터넷 산업이 부흥할 때 공무원 중에 인터넷이 뭔지도 몰랐을 공무원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거나 억울하다 생각하는 공무원 분들은 인터넷 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시점을 기억해 보시라. 그리고 Wikipedia 영문판을 찾아보시라. TCP가 뭔지, UDP가 뭔지, IP가 뭔지, TCP/IP가 뭔지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시라.) 최근 기사를 보면, 이해관계 충돌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오늘의 공무원들은 인터넷 사업모델이나, AI, IoT, 5G 등등에 대해 많이 안다고 착각하거나 아는 척 하고 있다. 장담컨대, 늘공 중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표제의 공무원공화국은 위 S3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보조금과 다른 법적, 행정적 통제로 대학은 등록금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얼마 전 읽은 기사에는 인당 보조금이 초등학교가 대학보다 많다고 한다. 상식이 어디에 있는지 나 자신을 믿지 못 할 정도이다. 고등학교도 정부의 보조금과 이러저러한 법적, 행정적 통제로 사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심지어 사유재산권 침해까지 발생할 수 있다. 개인과 민간단체의 의사결정을 이처럼 심각히 제한한다면 그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민주도 아니고 공화국도 아니다. 민주는 공무원주(), 공화국은 사회국 내지 공산국으로 변질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다시 쓰자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공무원주권사회국가이다. ‘공무원주권공산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대하거나 의심한다면 대한민국 헌법 1조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준에서 다시 보시라. 진정 주권이 .돼지국민에게 있는지,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시라.

정치권과 어공은 정치지형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늘공이다. 최근 늘공의 정치화와 건방이 권력화 내지 주권화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

세상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한번 만들어진 변화를 되돌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심각하게 우려하는 것은, 이 정권이 뿌린 포퓰리즘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어떤 보조금이든, 어떤 혜택이든, 합리성이나 공평성과 무관하게 이를 없애는 경우 그 수혜자들은 저항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기득권의 정의이자 본질이다. 기득권의 크기와 수혜자의 수는 반비례한다. 심지어 기득권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작은 혜택이 파급의 범위에서는 가장 크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되돌리기 어렵고, 그래서 위험하다.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길게 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민란이나 혁명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역사책을 보시라, 간단히는 Wikipedia 영문판을 보시라.

나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다. 비록 오늘 퇴보를 목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20.2.7
최원영

2020년 1월 29일 수요일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한 부족이 한 부족에게

부족주의(tribalism)”라는 근래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그 단어가 최근에 유행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읽은 50년도 지난 몇몇 책에서 그 단어를 봤다. 아마도 당시엔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거나, 내가 기억을 못 하거나 달리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글의 제목에는 말장난이 있다. ‘은 하나의 의미도 있고, ‘()’민족의 의미도 있다. 이 글은 최근 만난 옛 직장 상사와의 대화 중 갑자기 기억난, 그러나 당시 말하지 못한, 내 과거 에피소드의 나름 재해석이다. 이 글은 박OO 그 분을 위해, 그 분께 못 한 말을 쓴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다니던 학교에 일본 어떤 대학의 교수가 교환교수로 강의했다. 당시는 이른바 일본 때리기시절이 막 지나간, 1990년대이다. 일본에서 1990년대는 흔히 잃어버린 10으로 불리우지만 이는 아마도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의 명칭이고, 당시 내가 느낀 바로는 일본인들은 자국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교수는 국수주의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히 더 했다. 그 교수의 이름이 이 글의 핵심인 관계로 그 분 성을 실명으로 거론할 수 밖에 없는 점은 그 분께 미안하다. 그 교수의 이름은 야하기(矢作)이다 (성이고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한다).

야하기 교수는 자신의 제자 석사학위 논문 두 개를 교재로 배포하여 사용했다. 영문판이었는데, 원본이 영어인지 일어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첫 쪽 하단에 지도교수 이름이 있었다. 한 논문에는 교수의 이름을 야사쿠(Yasaku), 다른 논문에는 야하기(Yahagi)로 표기하였다. 나는 지도교수 이름도 모르는 제자들도 이상했고, 자기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 교수도 이상했다. 강의 내용은 한마디로 일본최고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수의 태도 때문에 상당히 수동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으나, 수업내용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강의 마지막 날 질문 있냐고 하기에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이 교제로 주신 제자분들 논문에 하나는 교수님 성함이 야사쿠, 다른 하나는 야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 예상대로 교수는 매우 당황하면서 장황하게 변명했다. 요는 일본어에서 한자는 음독(音讀), 훈독(訓讀)이 있는데, 한 학생은 음독으로 다른 학생은 훈독으로 내 이름을 표기했다.” (나는 바로 위에 언급한 교수와 제자간 이름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질문을 위해서 꾹 참았다.)

이어진 내 질문: “일본에서 교수님 성함 야하기(矢作)의 하기()가 하기로 훈독(訓讀)되는 다른 경우가 이름 외에 있습니까?”
교수: “없는 것 같다.”
: “근데 한국어로는 완전 말 된다. 한자 의 뜻은 한국어로 한다는 뜻이고, 명사형은 하기이다. 잘 아시겠지만 일본 이름에 한국어 발음에 의한 표기 많고, 교수님 성도 그럴 가능성 많다. 교수님은 아마 한국 도래인의 후손일 가능성 많습니다.”
교수: “그럴 수 도……”
교수는 황망히 교실을 떠났고, 학생들은 소리 없는 박수나 엄지 척 등 여러 제스쳐로 나에게 응원 내지 지지를 표현했다.

야하기 교수의 강의는 한마디로 일본최고가 그 내용이었다. 그의 쇼비니스트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었고 특히 한국에 대해 말할 때는 무시내지 경멸의 느낌이라 한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거부감이 있었다. 한국을 콕 꼬집어 거의 인종주의적으로 경멸했던 교수가 자신 스스로가 한국인 후손일 거라는 내 이론으로 교실에서의 망신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교수의 반응으로 볼 때, 교수는 그때까지 절대로 자신이 한국계 후손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고 생각한다. 부언하자면, 쇼비니즘은 전체주의이고, 인종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두에 말한 부족주의다.

야하기 교수의 이름처럼 일본어에는 일본인도 전혀 모르는 이상한 단어나 표현들이 있다. 일본 씨름인 스모에서 자주 듣게 되는 타가라 타가!” 혹은 핫기요이!” 등도 그렇고, 일왕(천황) 행차나 축제(마쓰리) 시 듣게 되는 왓쇼이등이 그렇다. 일본인들에게 이들 정체불명의 단어는 상당 부분이 한국말이다. 내가 예를 든 표현은 각기 다가서라!’, ‘(공격)해라!’, ‘(귀인이) 왔소뜻이다. (일본 스모는 함경도 씨름과 매우 흡사하고, 이들 표현 역시 함경 사투리 흔적이 있다. “왔쇼이의 경우, 백제와 연관 있고, 전라 내지 충청 사투리의 흔적이 있다.)

짧은 이 글의 결론을 몇 개의 질문으로 대신한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야하기 교수의 전체주의 및 부족주의는 그 개인의 문제일까?
(하나의 뜻, 야하기 교수의 일본) 부족이 한(한국의 韓) 부족을 경멸한 결과가 자기부정이라면, 그리고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과 자기합리화의 습성을 갖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무식말고 어떤 말로 이런 자기부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서 목도하는 반일주의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야하기 교수보다 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야하기 교수의 이런 희비극(tragicomedy)적인 오류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색이 교수가 이런 언행을 하는데, 학생들을 이런 선생들로부터 어떻게 보호 내지 격리시켜야 하는가? 이런 교수를 어떻게 해야 대오각성하게 해서 이성의 진영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까?

이 글 제목의 말장난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일본, 알고 보니 韓) 부족이 한() 부족에게한 말은 결국 자기부정이고 모순이었다. 모순은 에 있지 않고 부족에 있음은 명백하다 (명백하지 않다면 그건 이 글이 부실해서이다). 부족의 반대말은 여기서는 개인이다. 만약 한 개인이 한 개인에게한 말이었다면 내용도 수용도 결과도 전혀 달랐을 것이다. 야하기 교수의 희비극적 문제는 자신의 언행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 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일월의 마지막 날
최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