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이 글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1977년 소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
독후감이다. 나는 저자의 소설을 볼 때마다 한글 번역이 잘 되었기를 빈다. 저자의 대표작인 [성당의 대화]를 읽을 때는 심지어 같은 로망스어 계열인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당의 대화] 경우에는 번역의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영어판과 일어판을 구해서 검토했는데, 예상대로 번역은 모두 실망스러웠다. 한글판이 그런 이유로 없거나 (저자 본인이 인정하는 대표작의 번역판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이유건 유감), 설사 있었더라도 거의 읽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한글판은 일단 제목이 유감이다. 원제를 실제 내용에 맞게 번역하자면 "훌리아 사돈 아주머니와 극작가" 정도이다. 훌리아는 저자의 외삼촌의 처제로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한글판 제목이 뭔가 근친상간을 연상시키려고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실제 2장은 근친상간이 테마이다. 아마도 저자 자신도 비슷한 의도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내용상으로는 아마도 훌리아보다 더 중요한 극작가는 아예 제목에서 빠졌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제시한 직역이 훌리아와 극작가의 관계에 대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피했을 거란 생각도 하지만 상업적 의도가 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저자의 소설 중 6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저자의 대표작인 60년대 작품 3부작 ([도시와 개들], [녹색의 집], [성당의 대화]) 중 2권을 먼저 읽고, 이후 1997년 [리고베르트씨의 비밀노트], 2000년 [염소의 축제], 2010년 [켈트인의 꿈] 등을 읽었는데, 60년대 작품들과 90년대 이후 작품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 중간 기간의 소설을 찾게 되었고 이번에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의 스타일에 대해 나름 생각과 기대가 있었고, 이 소설은 사실 조금은 가볍고 읽을만할 (readable) 거라는 예상을 했다. 결론은 읽기엔 좋지만 가볍지는 않다는 것이다. 초기 작품처럼 복잡하고 집중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2000년 이후 작품처럼 주제가 (내 생각이지만) 노골적이지도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에게는 이 소설이 (여태껏 읽은) 저자 작품 중 [성당의 대화]에 이어 (아직 읽을 소설이 많지만) 두 번째로 좋은 소설이 아닌가 한다.
작품에 대한 나의 감상을 말하기 전에 작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저자는 1936년 생으로 이 글을 쓰는 현재 80세로 생존해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 같고, 그의 아버지는 이를 막기 위해 저자가 14세 때 군사학교(Colegio Militar Leoncio Prado)에 입학시킨다. 이때의 경험이 1963년 소설 [도시와 개들]의 주요 배경이 된다. 17세에 산 마르코 국립대학(Universidad Nacional Mayor de San Marco)에 입학한다. 강압적인 아버지, 당시의 독재자이던 오드리아(Manuel A. Odría) 치하의 사회상, 저자의 산 마르코 대학 때의 경험 등이 저자의 대표작인 [성당의 대화]의 주요 배경이 된다. 18세 때인 1954년 이 소설의 "아주머니"인 훌리아(Julia Urquidi Illanes)와 결혼, 1964년 이혼하고, 1965년 친사촌인 파트리샤(Patricia Llosa)와 결혼, 2016년 이혼하고, 현재는 이사벨 프레이슬러 (Maria Isabel Preysler-Arrastía, 모델, 방송인, 사회사업가)와 연인 관계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대부분은 자신의 직접 경험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소설 속 나이나 시점은 Wiki 등 다른 자료와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이 소설은 총 2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는 규칙적으로 저자의 (부분적으로) 자전적 소설과 (제목에도 있는) 극작가의 작품이 교대된다. (이런 구성이 저자의 특기이자 장점) 저자는 "지나치게 인위적이지 않도록 자서전적인 콜라주를 더하려고 했다"[2]고 하지만, 정작 훌리아는 1983년 출판한 [꼬마 바르가스가 말하지 않은 것][3]이라는 책에서 바르가스의 이 책에 대한 불만과 해명을 (훌리아의 꼬드김은 과장하고, 내조는 축소했다고 함)[4] 표한 것을 봐서는 자서전이 역으로 '지나치게 사실적이지 않도록 소설적인 콜라주를 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다. 다 읽고 지금 독후감을 쓰는 지금 이 시점에는 저자가 솔직하고 정확하게 말했다는 생각이다. 최소한 소설 내에서는 훌리아의 책에서 말하는 그런 점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구성 면에서는 초기 소설들에 비하면 시간, 장소, 인물이 장 별로 구분이 되어 있고, 장들이 매우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줄거리 전개가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스타일 면에서도 이 소설을 다른 소설들과 매우 다르다. 초기 뿐만 아니라 후기 소설에서도 유머는 거의 없는데, 이 소설에는 유머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약간은 가볍고 가끔은 미소 짓게도 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괄호와 따옴표를 거의 쓰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괄호가 매우 많이 쓰이는데, 대부분 유머 표현을 위한 것이다. 혹시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은 참고하시라. (한글판이 이 점을 잘 고려했어야 하는데…)
자전적 소설 부분 (홀수 장들)
일단 자전적 소설 부분에는 훌리아와의 만남, 연애, 결혼까지의 일련의 과정과 사건들이 나타나고, 등장인물로서의 저자의 생활과 생각이 서술된다. 당시 (사실은 지금도) 유행하던 드라마 (당시엔 라디오, 지금으로 치면 TV 연속극, 멜로드라마, 사실은 그리고 한마디로 막장드라마)
극작가 카마초(Pedro
Camacho)가 자전적 소설 부분에서 저자, 훌리아와 동일한 비중으로 나타난다.
7장에서 카마초는 혼자서 일일 드라마
10편을 원작, 각본, 감독 모든 것을 혼자 다 한다. 처음
10편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이게 가능한가?"라고 자문했다. 편당 최소
20분에 이르는 대본
10편을 매일 쓰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감독 역할은 그보다 더 시간이 많이 드는 일로 나타난다. 주 5일 방송이라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한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일해야 하는 살인적인 부담이다. 결국 카마초는 신경쇠약으로 극중 인물을 혼동하고 스토리 전개를 잊고 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소설에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카마초는 기억상실뿐만 아니라 현실감 상실, 다중인격, 궁극적으로 정신분열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7장 말미에 카마초가 여러 등장인물로 분장을 하고 바꾸는 것을 보면서 기억이 나고 짐작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전에 본 어떤 미국 범죄 드라마에서 여러 개의 신분으로 사는 사기꾼이 결국 비슷한 증상을 겪다 자살 내지는 살인을 하는 에피소드가 바로 떠올랐다. 바르가스 요사는 몇 개의 (사실상) 별개의 스토리를 엮어가면서 서술하는 것이 특기인데 (결말에 이르러야 서로 합쳐진다),
이 때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작가 스스로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위치를 잊게 될 수 있다.
[성당의 대화]가 극단적인 경우로, 심지어 한 문장 내에 여러 개의 시간, 공간, 인물을 (의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이 아주 세심히 읽지 않으면 상황 파악이 매우 어렵다. 나는 [도시와 개들]을 읽으면서 줄거리 맥락이나 인물간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수 없이 앞뒤로 뒤졌다. 이후로는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을 볼 때마다 주요 인물과 사건, 특정 표현을 엑셀로 정리하면서 본다. 작가 입장에서도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를 만들면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매우 세심하게 검토하고 확인해야 한다. 실제 바르가스 요사 자신이 [성당의 대화]가 (점검하고 수정하는 데) 가장 많은 노력이 들었다고 했다. 이 소설에서는 카마초의 입을 빌어 이러한 서술 구조의 목적을 공개한다:
"독자의 서스펜스를 유지하기 위해 무질서를 가장한다."[5].
바르가스 요사 자신도 자신의 서술방식이 갖는 문제와 위험성을 잘 느낀 것 같다. 카마초는 바르가스 요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생각이다.
소설 속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18세,
훌리아는
32세로 나온다
(Wiki 등 다른 자료와는 다름).
[도시와 개들]을 읽으면서 페루 소년들은 이렇게 조숙한지 놀랐었다. 군사학교지만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 과정인데, 술, 담배, 섹스, 폭력 등이 난무한다. (대부분이)
15세 소년들의 이야기지만 확실한
19禁 소설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르가스 요사는 실제 이 학교에
14세에 입학하고, 졸업전인
16세부터 아마추어 기자로 활동한다. 소설 속에서도 바르가스 요사는 대학생이면서
(라디오)
방송국의 보도국에서 주요 인물로 일한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파스쿠알은 동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부하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이자 당시 정권에 협조하던 유력인사였지만 훌리아와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바르가스 요사는 생계를 위해 7개의 일을 한다. 그 와중에 작품도 쓰고, 매일같이 (칠레로 피신한) 훌리아에게 편지도 쓴다.[6]
바르가스 요사의 성격과 능력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법학 전공 대학생이 (상황상 결혼이 꼭 필요했다고 해도) 훌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실행한 방법이 공문서위조와 공무원 매수였다는 것은 보면 그가 "코흘리개 (mocoso)" 취급 받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하여간 소설의 캐릭터로서 바르가스 요사를 보면서 (그의 스타일로 짐작하면 대부분 사실) 작가 바르가스 요사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다.
훌리아는 의외로 그다지 중요한 캐릭터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바르가스 요사보다
10살
(혹은
14살?)
연상이란 점, 그의 숙모뻘 사돈이란 점, 이혼녀란 점 등 객관적 상황이 주 역할이지 캐릭터로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대사에서 그녀의 활달함과 유머를 느낄 수 있으나 캐릭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거론한 그녀의 책 제목을 봐도 그녀가 이 소설에서 불만이었던 것은 아마도 곡해가 아니라 무시 당했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은 것".
카마초의 드라마 부분 (짝수 장들)
짝수 장들은 카마초의 드라마를 정리한 것들인데, 소설 속에서는 일종의 단편소설처럼 읽혀진다. 아마도 이들 대부분은 원래 저자의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스타일도 아니고, 주제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다. 다만 소설 전체의 맥락과 저자의 의도에 맞게 편집해서 삽입한 듯 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전부 다른 내용임) 그 자체로도 색다른 재미가 있다, 마치 돈키호테에 나타나는
"소설 속 소설"
같이.
첫 장인 2장은 남매간 근친상간,
4장은 바르가스 요사 자신의 소설,
6장은 아동(13세) 강간과 여호와의 증인,
8장은 존비속살해,
10장은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14장은 사회카톨릭 (정식용어 아님) 등 다양한 주제와 흥미로운 줄거리가 나온다. 이들 드라마가 이 소설에서는 소설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이들이 드라마로 제공되었음을 상상할 필요가 있고, 지금도 막장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누리듯, 소설 속에서 최고의 청취율을 누린다.
8장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4개의 별개의 드라마가 진행된다.
10장에서는 딱 한군데
(p.248) 8장의 등장인물과 상황이 나온다. 현실세계인 (홀수 장) 11장에서
"등장인물을 한 드라마에서 다른 드라마로 옮기고, 이름을 바꾸고 해서 청취자들을 혼란 시킨다"고 한다
(p.263). 이 상황은 점점 심해져서
14장에서는
4개의 별개의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16장에서는
6개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나오면서 혼동과 혼란이 극에 달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의 성별이 바뀌기도 하고, 직업도 바뀌고, 계급도 아래 위로 바뀌고, 심지어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현실세계인 13장에서 카마초는 이미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다. "내가 섞는 게 아니라 저절로 막 섞인다."
(p.316) 드라마 세계의 마지막인
18장에서는 앞서의 거의 모든 장의 등장인물이 다 모이고, 지진으로 모든 등장인물이 한번에 다 몰살한다. 카마초는 자신의 신경쇠약이나 그 결과를 해결할 방법이 없자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쓴 것이다: "참사는 스토리를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p.450).
드라마의 문제는 10장 즉 이 소설의 거의 절반까지 아무런 힌트도 없다. 10장에서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다음 장에서 일종의 설명이 나온다. 18장의 참사를 15장에서 암시하는 등 현실세계와 드라마 세계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상호 힌트를 줘서 읽는 재미와 긴장을 유지한다. 10장 이후로는 등장인물의 혼돈뿐만 아니라 상황설정이나 줄거리 전개도 혼란스러운데 이는 카마초의 정신건강 상태를 알려준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혼란이 너무 황당해서 웃기기까지 하다. 앞서 언급한 저자가 이 소설에서 활용한 괄호의 용법과 유머, 그리고 드라마 내의 혼동을 다음 한 구절이 잘 보여준다:
(¿Lucho? ¿Ezequiel?) Marroquín Delfín (c.16, p.389): 갑자기 나타난 범죄자
Lucho Abril Marroquín (c.10): 제약사 영업직원
Ezequiel Delfín (c.12): 여호와의 증인 신도
한 인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이 둘로 나뉘어지다 보니 성과 이름이 4가지로 조합이 가능한 상황으로 이 경우엔 괄호가 특히 재미있다. 혼동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정신분열의 증상으로 보인다. 18장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이런 정체성 혼란은 극에 달하기 때문에 이런 괄호가 여럿 나온다.
이 소설은 서평 등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심오하다. 한글판도 있으니 일독을 추천한다. 이 글이 이 소설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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