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인의 꿈
이 책은 영국 외교관이었고,
아일랜드 독립주의자였던 로저 케이스먼트 경(Sir
Roger David Casement)의 일대기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책 혹은 전기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콩고, 아마존, 아일랜드 등 크게 3개의 파트, 총
15개 장으로 구성된다. 홀수 장들은 케이스먼트 경의 최후 3개월을 서술하고, 짝수 장들은 그의 출생부터 최후 4개월 전까지를 서술한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대부분 두세 개의 서로 다른 시대와 인물의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서술하는데,
이 책도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것이지만 시대를 이런 식으로 교대시키면서 서술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이런 서술 기법은 소설마다 효과가 조금씩 다른데, 이 책의 경우에는 現場感, 現在感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홀수 장들은 마치 눈 앞에 보는 것 같고, 짝수 장들은 마치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하다.
케이스먼트 경은 영국 영사 자격으로 레오폴드 2세 벨기에 왕의 실질적으로 개인 식민지였던 콩고의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조사하고 보고하여 (1904년) 결과적으로 벨기에의 식민지 정책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1910년에는 아마존 지역 고무 농장의 원주민 착취 및 학대를 조사 및 보고하여 페루 정부로부터 개선을 약속 받았지만, 이듬해 조사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자 영국 정부는
1912년 케스먼트 경의 보고서를 출판하게 되면서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그 결과 고발의 대상이던 당시 세계 최대의 고무 회사 페루 아마존 회사
(Peruvian Amazon Company, PAC)는 마침내 붕괴된다. 케이스먼트 경은 이 두 업적으로 영국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지만, 정작 자신은 두 대륙의 식민지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모국인 아일랜드 역시 영국의 식민지이고 영국의 압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1913년 영국 외무부 퇴직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과 영국은 전쟁을 하게 된다. 케이스먼트 경은 독일이 영국 본토를 침공하고, 아일랜드가 독일의 군사지원을 받아 동시에 영국을 공격한다면 영국은 패배하고 아일랜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독일에 가서 독일 수뇌부를 설득한다. 독일은 영국 본토 공격은 거부하고, 군수지원만 하기로 한다. 그사이 아일랜드 독립주의 수뇌부는 부활절 봉기(the
Easter Rising, 1916/4/24-29)를 결정한다. 뒤늦게 이를 안 케이스먼트 경은 독일의 동시적 침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봉기는 (비록 무기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독일이 제공한 2만 정의 소총은 전달되지 못 함.)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고 봉기를 만류하기 위해 독일 잠수함을 타고 봉기 3일전에 가까스로 아일랜드에 도착하지만 상륙한 해안에서 체포되어 영국으로 이송되어 재판 받고 교수형을 언도 받는다. 각계의 많은 사람들이 구명활동을 하지만 결국 1916년 8월 3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상이 간략한 케이스먼트 경의 인생이자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케이스먼트 경의 구명활동 기간 중 그의 일기("Black Diaries")가 공개(아마도 영국 정부에 의한 누설)된다.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동성애자이자 아동성애자로 보여지고, 맞던 틀리던 이런 인격살인은 당시 매우 보수적이던 영국 사회에서 그의 구명활동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일기 자체는 그가 직접 쓴 것이 맞지만, 그 내용이 사실을 기술한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저자 바르가스 요사는 케이스먼트 경이 동성애자이며 일기의 최소한 일부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만 저자는 케이스먼트 경 일기의 상당부분은 (원했을 수는 있으나 하지는 못한) 상상, 환상, 과장이라고 한다. 저자의 종합적인 의견은
"영웅이나 순교자는 추장적인 전형이나 완벽의 본보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2]라는 것이다. 케이스먼트 경은 반식민주의와 인권옹호의 영웅이자,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였지만,
그만의 선과 악, 고민과 비밀이 얽혀있던 '인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콩고와 아마존 보고서는 (외교관보다는) 언론인으로서 후세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노예나 강제노동,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잔혹행위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지만, 너무 우울한 내용이라 이 글에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케이스먼트 경은 매우 흥미롭고, 인간 본성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역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주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족주의: 아일랜드와 영국, 한국과 일본
케이스먼트 경은 영국군으로 싸우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아일랜드인들을 아일랜드 여단(Irish
Brigade)으로 조직해서 독일과 한편이 되어 영국과 싸우려 했다. 벨기에 전선에서 포로가 된
2,200명의 아일랜드 출신 영국군 중 아일랜드 여단에 참여한 군인은
50여명에 불과했다. 지원자를 모집하기 위해 연설하던 케이스먼트 경은
"반역자",
"변절자",
"매수된 자",
"버러지"
등의 욕설과 함께 돌팔매를 당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에게 포탄과 독가스 공격을 퍼부었던 적, 지금도 자신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적과 합세하여 현재까지도 소속국인 영국을 공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케이스먼트 경이 틀렸고 포로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1942년,
장소를 만주로 바꾸면 결론은 달라진다. 징용되어 일본군 소속으로 싸우다 연합군 포로가 된 한국인들에게 연합군의 한국 여단으로 일본을 무찌르자고 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 포로는 참여했을 것이다. 케이스먼트 경이 옳았고 내가 잘 못 생각한 것일까?
아일랜드와 한국을 맞비교 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아일랜드는 대략
16세기 중반 헨리 8세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이 소설의 시대인
20세기 초에는
300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였다 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일합방부터 해방까지를 일제
36년이라 부른다.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에 동화되어 어떠한 형태의 분리도 반대하는 입장이고,
Sinn Fein (한국어로 번역하면 "우리당"),
IRA, Belfast 등 생소한 몇 단어로만 기억되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영국이다. 나머지 아일랜드 지역은 지금은 마치 오래 전부터 다른 나라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일제는 창씨개명, 한국어 금지 등 내선일체 정책, 즉 국민화 정책을 펴왔다. 대만 등 다른 점령지 혹은 식민지도 마찬가지였다.
영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했다. 아일랜드와 한국의 차이가 일본과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정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북아일랜드와 기타 지역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는 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종교, 언어, 문화, 착취, 차별대우, 동질화의 기간과 정도, 국내외 정치적 상황 등 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공히 민족주의
(nationalism)가 근본 배경이나 주요 목적은 아니었다 해도 그 진행 과정에서는 중요한 변수, 수단, 목적이 되곤 했다. 나치즘(Nationalsozialismus)은 독일어
nation의 첫 두 음절에서 온 단어이다. 여기서
nation은 국가라고 보통 번역하지만,
언어적으로나 행태적으로나 민족과 마찬가지다.
나치 독일에서 보듯 민족주의는 곧 인종주의이다.
박해 받을 때에는 민족주의가 되고, 우월한 위치에 있을 때에는 인종주의가 된다. 평화시에는 세계주의
(cosmopolitanism)가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인종주의는 비난의 대상이나, 전쟁시에는 강력한 友敵의 구분자가 되어 세계주의를 압도한다. 케이스먼트 경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그리고 전시냐 평시냐에 따라 달리 평가될 것이다.
21세기에도 민족주의 즉 인종주의가 여러 분쟁의 원인이나 수단이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노골적 이해관계가 차라리 덜 잔인하다. 최소한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는 본질적으로 감정적이며 홀로코스트에서 보듯 인간성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씁쓸하지만 민족주의는 다음 세기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이 지금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미국도 남북전쟁을 겪고서야 지금의 동질성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이 그러한 동질성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중국이 더 발전하고 민주화되었을 때,
1995년 캐나다 퀘벡 분리 투표 같은 상황이 신장이나 티벳에서 발생하면 어떻게 될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인격살인
어떤 주장의 맞고 틀림은 주장의 내용 자체의 문제이다. 누가 주장을 했는가는 무관하다. 링컨이 말했다고 바로 진실이고,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다고 자동으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학 교과서에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는 화자의 신뢰성이 주장의 신빙성이나 정당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격살인은 목표 인물의 신뢰성을 손상시켜 그의 주장을 무력화 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동성애는 아마 가장 많이 사용된 인격살인의 수단이 아닐까 한다. 케이스먼트 경의 경우에도 동성애가 인격살인의 목적으로 언론에 유출되었다.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책 [염소의 축제]를 보면,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는 암살과 함께 인격살인으로 두 번 죽이는 경우가 많고 그때 동성애가 주로 내용이 된다. 현재에는 동성애 그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닌 세상이지만,
인격살인의 수단은 그 외에도 많다. 공통점은 그 시대, 그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고 혐오스러운 속성이라는 것이다. 거짓말, 변태, 전과, 사생활, 등이 어떤 인간의 됨됨이를 알려주는 것은 분명하고, 어떤 직책 수행에 적절한지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인사청문회에서 이른바 신상털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특정 이슈나 특정 주장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이러한 화자의 됨됨이는 무관하며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러한 됨됨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비밀로 유지되어야 한다. 배심원들이 외부 정보나 영향으로부터 차단되도록 격리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언론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편향도 안 되지만 사실이라고 다 보도해서도 안 된다. 현재와 같은 네트웍 시대에는 결국은 정보 소비자의 소양의 문제이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사태"는 그런 점에서 절망적이었다.
이 책은 일단 재미있고,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특히 좋아할 만 하다. 바르가스 요사의 책 중에는 서술 방식 등이 평이한 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책들보다 구성의 정교함은 좀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한글판이 없다. 영어판은 [The Dream of the Celt]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