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성당
(이 책의 무대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로니아어가 사용되고, 이 책에도 고유명사 등 다수의 카탈로니아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이 글에서의 한글 표기는 원래의 발음과 다를 수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1320년부터 1384년까지의 역사를 완전 編年體로 전개하고 있고, 이와 평행하게 아르나우(Arnau)라는 주인공의 인생이 함께 펼쳐진다. 주인공의 인생은 4개의 파트로 나뉘었고, 각 파트는 주인공 인생의 큰 전환점이자 매우 다른 인생이다.
1) 땅의 노예 (농노):
어머니 프란세스카는 결혼식에서 영주에게 강간 당하고, 이후 주인공이 태어난 이후에도 영주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영주의 성에 끌려가면서
(관습법상 합법) 아버지 베르낫(Bernat)은 젖먹이 주인공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탈출한다.
2) 귀족의 노예
(8-14세):
고모의 도움으로 고모 가족과 함께 살다 사촌이 죽는데 주인공이 누명을 쓰게 되면서 고모는 주인공 가족에게 냉담해진다.
고모가 죽자 주인공 가족과 고모의 가족은 더욱 더 소원해지고,
고모부의 새 부인의 계략으로 아버지는 소요에 연루되어 교수형 당한다. 이후 주인공은 짐꾼이 된다.
3) 욕망의 노예
(18-41세):
결혼했으나 유부녀인 첫사랑과 간통 관계를 지속하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인이 된다. 흑사병이 돌자 유태인들이 공격받는데,
유태인 아이들 몇을 구하게 되고 그들의 아버지 아스다이와 친구가 되고 그의 도움으로 사업가, 이후에는 시장까지 된다. 바르셀로나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큰 공을 세우고 왕은 주인공에게 작위를 주고, 고아가 된 자신의 조카 엘리오노어와 주인공을 결혼시키지만 둘의 관계는 극히 소원하다.
4) 운명의 노예
(46세):
유태인이 다시 박해 받는 과정에서 친구 아스다이가 죽고 주인공은 이단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사촌들과 그 외 주인공에게 불만이 많던 귀족들이 종교재판에 가담하지만 자신의 오랜 부하이자 친구인 기옘의 도움으로 주인공은 풀려나고, 주인공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서로 사랑하던 양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종교,
정치,
사랑,
불륜,
우정,
음모,
복수 등 많은 요소와 사건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복잡해서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지나치게 복잡하다"(p.
568)는 점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저자는 이 책을 포함 3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모두 전기 성격의 역사소설이란 공통점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가 뒤섞여 있는데, 소설적 허구를 위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콘돔이 사용되는데 이는 소설 속 시대보다
400년 정도 이후의 모습이다.
이 책은 400만부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고 한국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 많이 읽힌 책은 분명 재미는 있다. 아마도 사랑과 배신, 음모와 복수, 성공과 좌절, 이런 테마가 재미를 주는 것 같다. 나 역시 이런 점들과 줄거리 전개가 재미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촌철살인 하는 화려한 표현도 없고, 세르반테스의 놀라운 구성이나 위트도 없다. 두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문학작품에서 감탄하는 이들 요소가 전혀 없고, 오로지 스토리만 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느끼는 이 책의 단점 한두 가지만 지적하면:
1) 캐릭터의 일관성 부족: 주인공 아르나우는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이다. 종교적으로 매우 독실하고, 무한한 박애주의자이며, 요부(알레디스)를 만족시키는 변강쇠 이지만 38세부터 8년간 한번도 섹스를 안 한 강철 같은 의지의 금욕주의자이고, 만인이 존경하는 시장이자 판관이며, 숙달된 군인이자 노련한 전략가이며, 온갖 불합리한 관습법을 철폐한 혁명가이며, 노련한 사업가이자 은행가이다. 대충 링컨, 버핏, 아퀴나스, 이순신 등을 합쳤다고 보면 될 것이다. 8세까지는 산타 클로스를 믿는 순진무구한 아이였다가 (pp. 93-94) 14세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요청하는 조숙한 소년이다 (pp. 243-244). 동생 조안은 처음에는 형보다 조숙하지만 10세 즈음에는 8세 때의 형과 비슷하게 순진해진다. 다른 많은 캐릭터들이 타고난, 이유 없는 증오를 갖거나, 합리와 억측, 선량과 난폭 등 모순된 성격을 동시에 갖거나 이유 없이 변한다.
2) 개연성 부족: 주인공은 불륜 관계의 도피 수단으로 군인이 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군인인 기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이후의 사건 전개에 있어서도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情婦 알레디스가 군인이 되려 떠난 주인공을 찾아가다 주인공의 어머니인 프란세스카를 만나게 되거나, 주인공의 아버지가 소요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이나, 동생 조안이 종교재판관이 되는 과정 등 많은 사건이 우연의 일치에 의한다.
3) 개연성 과잉: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면서도 또한 과도하다. 복선이 과도하게 많다 보니 복선이 뻔히 보일 정도이다. 여인 농노가 영주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할 수 있다는 관습법이 서술되고 바로 6쪽 뒤에 주인공과 프란세스카는 영주의 성으로 끌려간다 (pp. 29, 36). 저자가 개연성에 너무 집착했거나 개연성의 부족을 억지로 보완하려 했다는 느낌이다.
4) 장황함: 저자가 현직 변호사인 이유인지 법적인 개념이 매우 많이 나타난다. 법 자체뿐만 아니라 관할권도 자주 언급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역사도 많이 언급된다. 건축물이나 건축 공법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해전에 사용된 무기들도 저자에겐 매우 흥미로웠던 것 같다. 경제학, 특히 거시경제학 및 국제금융론은 별다른 이유 없이 매우 소상하게 거론된다. 이 책은
650 쪽이 넘는 분량인데 (단권으로는 매우 긴 편),
이런 장황함만 없었다면 아마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5) 카탈로니아 단어: 고유명사야 그렇다 치고, 일반명사도 내가 센 것만 10개가 넘고, 각주 등에 의한 직접적 설명이나, 문맥을 통한 간접적 설명이 없는 것도 다수 있다. 카탈로니아 단어의 의미를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스페인에 사는 스페인어 사용자 아니라면 약간은 짜증스러운 것이다.
이와 같은 단점과 이 글에 쓰지 않은 다른 많은 힌트는 저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1) 박학다식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2) 종교적으로 매우 독실하고, 3) 카탈로니아 독립을 지지하고, 4)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5)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장황함이라는 단점은 내게는 매우 큰 장점이 되었다. 역사, 특히 사회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런 장황함 속에 사회사적 요소를 많이 보았다.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 정말 해괴한 관습법은 영주와 농노의 관계를 잘 보여주며, 농노의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최소한 스페인 내전 당시까지 이어진 여성관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14세기 당시의 건축 공법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어떤 언어 버전이든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나만의 재미 때문에 나는 저자의 다른 책, [맨발의 여왕 (La reina descalza)]을 샀다. 평소 관심 있던 집시에 관한 책이라…
베스트셀러 소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 bestseller를 산다고 bestbuyer가 되지는 않는다.
끝.
[현재까지 접한 스페인 소설은 나에게 있어 대체로 3부류이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같이 너무 문학적이라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이하게 쓰고 위트가 풍부한 세르반테스나 볼라뇨(Roberto Bolaño) 같이 훌륭한 소설, 이 책과 같이 재미만 있는 소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