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집
이 글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1966년 소설 [녹색의 집][1]
(La Casa Verde) 독후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이른바 "3부작" (1963 [도시와 개들], 1966 [녹색의 집], 1969 [성당의 대화]) 중 중간 작품이다. 그러나 이들은 저자의 초기 작품들로 어느 정도 공통점은 있으나 흔히 짐작하게 되는 연작의 의미는 아니며, 내용상은 아무 관련 없다. 서술 스타일에서 이들 "3부작"은 유사성이 있고, 이후의 소설과는 구별이 될 뿐 다른 공통점은 없다.
일단 소설의 제목 혹은 그 번역에 대해서 간단히 짚어보면, 직역으로는 대충 표제의 한글판의 제목 정도이다. 녹색이 아마존 밀림의 녹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는 소설의 맨 끝부분에서 그렇고, 대부분의 범위에서는 녹색이 음란을 의미한다. 소설의 "녹색의 집"은 賣淫窟이다. 음란을 의미하는 색이 문화권마다 다른 것 같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 "금연" 등 몇 가지 경고문을 봤다. 여러 경고 중 다른 것은 (한자 세대인 관계로) 바로 의미를 알았는데 "禁黄"은 알 수 없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黄"은 음란이고, "禁黄"은 음란행위 금지라는 뜻이었다. 스페인어의 경우 녹색(verde)은 호색 내지 음란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 의미는 아니고 특정 표현에서만 쓰이는 데, 다른 표현도 물론 있겠지만, 내가 직접 본 용례는 好色老(viejo
verde) 정도이다.
좀 길었지만, 결론은 제목을 보고 온실을 짐작하면 한참 헷갈릴 것이라는 점이다. 賣淫窟과 그 주변의 인물과 사건이 이 소설의 모티브다.
구성과 서술방식
앞서 언급한
"3부작"은 복잡한 구성과 난해한 서술방식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전문적으로 문학이나 스페인어를 공부 하고 있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고역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3부작"
중 첫 번째를 맨 처음 읽었고, 그 후 세 번째 소설을 읽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 소설이 가장 복잡하고 난해해서 새삼 놀랐다. 이 책의 구성과 서술방식을 아래 표로 일단 정리했다.
맨 왼쪽 열은 파트와 장이다. 에필로그 포함 5개 파트,
2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와 장은 5개의 거의 별개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5개의 열로 정리하였다.
그 중
1, 2, 4열은 아마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3, 5열은 피우라(Piura)라는 해안가 사막 지역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각 장은 이들 5개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서술되는데,
4열은
2장에서 끝난다. 에필로그는 각 이야기마다 따로 있는데,
3, 5열 피우라에서의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크게 선후 관계가 있는데 에필로그에서 현재 시점이 되면서 합쳐진다. 위 표에서 회색 부분은 내용이 없는 부분이다.
서술방식도 매우 다양한데, 일단 노란색 부분은 한 블록 전체가 (거의) 단 문단으로 구성된 블록 들로 따옴표 등 대사 구분 표시 없이 죽 서술된다. 때로는 한 문장 내에서도 여러 화자가 대화한다. 주황색 부분은 주로 줄표(—)로 대화와 화자가 구분되지만 여러 대화가 교차해
(interlaced) 있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한 말인지 알기가 매우 어려운 블록이다.
3파트의
3열의 경우에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 혹은 '내부적 독백' 형식의 서술방식으로 매우 난해하다.
나는 이 소설의 구성과 서술방식은 실험적이라는 생각이다.
"3부작"
중 이 소설이 가장 실험적이고 난해하다는 생각이다. [도시와 개들]에는 서술관점의 변화, 내부적 독백 등의 서술방식이 나타나지만,
"교차 문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성당의 대화]에는
"교차 문장"이 빈번히 사용되지만 다른 서술방식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3부작" 이후의 소설들에서도
2-3개의 이야기가
"머리 땋듯"
혹은 새끼줄 꼬듯 교대되는 경우가 많고, 교차 대화도 자주 나타나지만 내부적 독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줄거리와 대화의 교차(대부분 대비)의 효과는 독자의 긴장감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서 저자는 소설 속 캐릭터인 페드로 카마초의 입을 통해
"독자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부조화를 가장한다"[2]
했고, "스토리는 유사성(afinidad)이 아니라 대조(contraste)로 구성되어야 한다"[3]
했다.
(강렬한)
대조와
(일견)
부조화는 독자의 긴장감을 유도하고, 이것이 저자의 가장 큰 특징이자 특기이다.
이 소설에서 쓰인 '의식의 흐름'은 의도적으로 모호한 서술을 위해 쓰인 듯 하다.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나타나지만 복선이나 이전 참조가 (인터텍스튜얼리티,
intertextuality) 많이 사용되어 마치 탐정소설을 읽는 느낌도 난다. 이러한 전후방 참조 역시 독자의 긴장감을 강요한다.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기교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지나친 긴장감도 문제지만, 이해 자체가 어렵다. 한글판의 독자평을 몇 개 봤는데, 대부분 (몇 번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이었다.
짐작컨데 번역 하는데 무지 고생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심지어 영어로 번역한다고 해도 매우 어려울 것 같고 결과물인 영어판도 난해할 것 같다.
주제
구성과 서술방식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이 주제이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두 지역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주요 인물들의 성격과 행위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앞서 언급한 5개의 스토리를 간단히 정리했다.
1. 선교원과 수녀들
아마조니아 오지에 선교 목적의 수녀원이 있고, 이들은 원주민 아이(주로 여아)를 납치해 기독교화 시킨다. 이들 여아들은 몇 년 수녀원에서 생활하고 교육받고는 인근 도시의 유력자 가정에 입양된다 (실제로는 가정부로 팔려간다).
2. 푸시아(Fushía)의 일생
잔인하고,
변태적인 악당(도둑, 밀수꾼, 살인자)의 일생이다. 푸시아와 그의 친구이자 부하인 아킬리노(Aquilino)의 대화로만 전개되며 다른 스토리와의 연관성이 그리 많지 않아, 아마조니아 지역 원주민과 이주민(백인 및 혼혈)의 삶과 상호작용을 보여주려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보인다.
3. 안셀모(Anselmo)와 "녹색의 집"
해안이자 사막의 도시인 피우라에서의 안셀모의 일생과 그의 매음굴
"녹색의 집"의 이야기이다.
4. 보르하(Borja)
아마조니아 지역 보르하에 주둔한 군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아마조니아 지역의 여러 사람들의 삶과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5. 리투마(Lituma)
피우라 출신의 건달이고, 수녀원이 있는 니에바(Santa
Maria de Nieva) 지역의 경찰인 리투마의 니에바 및 "녹색의 집"이 있는 피우라에서의 사건들이다.
표현의 측면에서 이 소설은 저자의 다른 소설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 소설에는 화려한 표현들이 많다. 주로 피우라의 바다와 사막, 아마조니아의 밀림을 표현할 때 화려한 표현을 많이 썼고, 이들 자연환경과 풍광은 마치 실제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르가스 요사의 문체는 상당히 건조한 편인데, 이 소설에서는 세밀하고도 화려하다. 인물의 캐릭터나 감정 표현도 다른 소설에 비해서는 풍부하지만 화려한 정도는 아니다.
주제의 측면에서 이 소설은 결론 없는 소설 같다.
5개의 줄거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제가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 이 소설은
1946년 피우라, 1962년 아마조니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토대로 쓴 것이기 때문에 (보통 소설에서 흔히 보는) 인물들의 스토리라기 보다는 집단으로서의 사람들의 이야기 성격이 강한 것 같다. 원주민에 대한 외지인의 착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 등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잔혹행위는 저자의 다른 소설 [켈트인의 꿈]에도 나타난다. 이 소설은 대략
1920년대부터
1950년대를 무대로 하고 있고,
1930년대 말로 추정되는 2차 대전 시기의 아마조니아 지역의 고무 밀수가 나타난다.
[켈트인의 꿈]은 1차 대전이 무대인데, 주인공 케이스먼트 경의
"아마존 리포트"
이후 아마존 지역의 고무산업은 완전 몰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역사적 사실).
20년 후 다시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매우 씁쓸했다. 현대 내지 현재에도 원주민에 대한 수탈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여성에 대한 차별 내지 착취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칠레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2004년 소설
[2666]은 실제 멕시코에서 있었던 여인 연쇄살인이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데,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지는 여성 차별 내지 착취도
[2666]만큼 우울하다. 이것이 '남미현상'인지 '후진국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Pantaleón
y las visitadoras])라는 일종의 속편을 썼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바로 읽을 생각인데, 좀 덜 난해하고, 좀 덜 우울하길 바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