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동아일보에 “블루오션은 환상… ‘붉은 여왕’처럼 끝없이 경쟁하라”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http://www.donga.com/news/Main/article/all/20191204/98666048/1
제 글과 최소한 일맥상통합니다. [블루오션, 레드오션, 황당오션] http://cephalocide.blogspot.com/2012/06/blog-post.html
오래된 글이고, 이 글을 쓴 2012년에도 한 물 간 주제였지만, 굳이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면, '요설로 흥한자 요설로 망한다' 정도 아닐까요?
2019-12-5
최원영
2019년 12월 4일 수요일
2019년 11월 2일 토요일
다시 읽는 [노예의 길] Friedrich A. Hayek
약 30년전에 이 책을 읽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혼란을 목도하면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바 “강남좌파”의 정체와 위험성을 알고 싶었고, 이 글을 볼 몇 안 될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이다. 이 책을 다시 보고 나서 (갑자기) 든 생각은 “강남좌파”가
좌파의 특이한 부류가 아니라 좌파는 ‘강남화’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본문만 326 페이지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편이다. 이 책은 2차대전중인 1940-1943년 저술되어, 초판은 1944년에 출판되었다. 나치 정리와 종전 이후 올바른 이념 제시를
제때 하기 위해 책의 구성이나 내용도 최대한 간략하게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참고로 저자 하이예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이다. 이 책은 많은 논란과
분노를 야기했다. (p.34) 내 짐작으로는 정의를 독점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나치즘과 마찬가지라 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비난한 당시 저명한 철학자도 “물론 읽지 않았다”(p.34)고 말했듯, 이념의 관점에서 흑백논리의 대상이 되어 읽을 필요도 없는 ‘나쁜
책’이 되었다. 아마도 이 책은 한국의 이른바 좌파가 가장
싫어하는 책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도 많은 비판과 폄훼를 들었으나,
그들도 이 책을 “물론 읽지 않았다”.
무엇이 왜 노예의 길인지 밝히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은 사회주의다. 현대에는
사회주의가 너무 많은 뜻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사회주의자”(p.44)라
할 정도이다. 복지국가, 진보주의, 전체주의, 계획경제, 공산주의, 보호주의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관행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사회주의라 칭하기 때문에 분명히 정의를 내리고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세금와 국가기관을 통해 광범위한 소득재분배(p.36)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중앙계획경제(p.36)를
의미한다. 사회주의의 반대편에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경쟁체제, 시장주의가 있다.
사회주의자는 반대진영의 핵심가치인 자유의 의미를 교묘히 바꾸어 “새로운
자유”, “경제적 자유”(p.70)라는 말을 만들었고, 이 말들은 경제적 평등을 의미한다. 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는 광범위한
소득재분배, 궁극적으로는 생산의 통제(p.159)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정반대의 체제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모든 소비, 생산, 직업 등에 관한 모든 개인의 의사결정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목적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p.115) 사회의 노력을 특정한 사회적 목표를 향하도록 의도된 조직의 존재가 모든 집단주의 체제의 공통점이다. (p.111) “경제적 자유”라는 일견 사소하고 선의의 의미조작이
광범위한 소득재분배와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노예의 길”로
귀결된다. 저자가 두려워하는 것도 이러한 순진한 선의가 히틀러나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로 연결됨을
대부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는 기술의 변화로 경쟁이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독점이 나타나며
(p.94), 경쟁체제는 “독점자본주의”로 귀결된다고
한다. (p.98) 역사적으로 볼 때, 독점은 자본주의의
필연이 아니라 예외이다. 독점이 나타난 경우에도 법적 규제와 정부의 통제로 독점의 효과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수준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자본의 독점을 국가의 독점으로 바꾸자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의 독점은 러시아 올리가키에서 보듯 자본주의의 독점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해롭다.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에서는 일견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관리자(계획주의경제의 계획자)가 없을 수 없고, 이들은 잘해야 관료 혹은 임명직 독점자본가가 된다. 이들은 공히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 (pp.179-193)
사회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법치국가’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치의 핵심은 사전에 알려지고 확정된
규범에 따라 국가가 운영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주관적 이념으로 배분적 정의를 직접적으로 지휘하는 것은
법치의 파괴를 초래한다. (p.141) “법의 사회화”(p.142)는
법치를 파괴한다. 법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주관성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관료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통제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자기편에만 눈 뜨고 있는 인간에 의한
인치일 뿐이다.
경쟁의 본질은 동일한 조건으로 모든 이가 모든 활동에 참가할 수 있으며, 공개적
혹은 은폐된 힘으로 이런 참가를 제한하는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도 관용하지 않는 법의 존재이다. (p.85) 경쟁체제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에서는 따라서 법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법치 없이는 경쟁체제(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전제)는 있을 수 없다.
국가가 특히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개인의 모든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원리이며, 자유의지 없는 인간은 노예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다른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이 글은 거의 책 제목을 설명하는 수준에서 개요만 소개하였다.
한국의 최근 상황에 시사점이 있는 내용을 추가로 간단히 소개한다.
사회주의는 개인이 변덕스럽고 무책임하다고 보며, 의회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무능하다고 본다. (p p.111-125): 히틀러의 예에서 보듯 사회주의를 선택한 선거는 마지막 선거가
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잃는 것을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교체로 인식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격렬하게 저항한다.
계획경제의 지도부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가축으로 취급 (p.69): 이는
개인을 인간으로서 존중(p.56)하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반대의 결과이다.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해야 하다”는
발언과 같다. 같은 사람이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된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자유가 아니라)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주장하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경멸한다. 이런 말,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라 보면 틀리지 않을 겄이다. 사회주의자에겐 상호 모순되고 배타적인 개념과 상황도
언어의 오용과 말장난(p.227)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로 만들 수 있다.
“노동자귀족” (p.189), “정장
넥타이 프롤레타리아” (p.190): 사회주의가 특정 세력을 편애한다는 저자의 지적이다. 민노총 등 일부 귀족노조 등장의 예언 같다. 사회주의의 지도부가
이른바 “강남좌파”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우적개념 (p.219), 관용은 …
전체주의 국가의 탄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pp.56-57): 사회주의가 반민주적이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사회주의는 일단 우리편과 네편으로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게는
전혀 관용이 없다. 전상인 서울대 화경대학원 사회학 교수, 박용진
민주당 국회의원, 박형준 동아대 교수 (전 MB 정무수석) 등이 한국사회의 전체주의화 경향을 지적한 것도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끝으로, 책에는 없지만 저자의 생각을 빌어 문재인 대선후보 수락연설문의
유명한 구절을 살펴보았다. 원문을 인용하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2] 기회의
평등은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이다. 위에 썼지만 사회주의는 “경제적
자유”라는 말장난으로 기회가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는
그들의 정의를 개인의 자유에 우선시 한다. 따라서 “정의로운
기회”를 주장한다. 문재인 후보의 말을 사회주의 관점에서
다시 쓰면, “기회는 정의, 결과는 평등” 이렇게 된다. 결과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정부에 의해 강제된 것으로, 강제된 것이므로 노예적[3] 이다. 마지막으로, 과정은
위에 쓴 대로 사회주의의 속성상 법치가 아닌 인치가 불가피하기에 자의적이고 편향적이다. 문재인 후보의
구절을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쓰면: “기회는 우리의 정의대로, 과정은
우리 방식으로, 결과는 강제적(노예적)”.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새로
쓴 그의 연설문 구절이 오늘의 실상을 원문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는 사회주의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문재인 후보의 연설문을 찾아보았는데, 다른 부분에서도 달리 해석할 부분이 많아 연설문에 대해 별도의
글을 쓸까 생각 중이다.
조국 씨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했다. 모두에 썼듯, 사회주의는 많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에 그 중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그는 하이예크의 사회주의자이지만, 그의 말은 북유럽
사회주의로 들어주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씨 같은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도 하이예크의 사회주의자이다. 말장난 하는
조국 씨와 침묵하는 문재인 대통령, 내가 보기엔 난형난제다.
2019.11.03
최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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