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3일 목요일

소설과 함께 한 일년 반

소설과 함께 일년
최원영                                                                                        2016-06-24


작년 초부터 일년 반을 소설을 읽으며 지냈다. 중국어 공부를 위해 읽은 鲁迅의 [呐喊] 제외하고는 소설을 읽은 30년도 넘은 같다. 어릴 때는 나름 많이 읽었지만, 줄거리와 표현에만 관심이 있었다. 소설에 대한 편견도 생긴 것이다. 3인칭 全智적 관점에서 과거형으로 서술하고, 시간은 과거-현재-미래 방향으로 흐르고, 사건은 허구이지만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캐릭터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문법은 당연히 지켜져야 하고,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신문기사나 史書를 소설의 모델로 생각한 같기도 하다.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력, 표현은 작가의 文才이고, 소설에 외의 것은 없거나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같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시작했다. 원래 2권의 책으로 구성된 것인지도 몰랐고, 양이 그리 많은지도 몰랐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반테스와 그의 이름이 소설 속에서 등장한다. 작가와 등장인물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도 있다. 작가가 독자에게 거는 장면도 있다. 나는 재미있는 작가시네 라고 생각했다. 胡蝶之夢 같이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없다는 생각도 있고, 보이는 것이 실체인지 믿는 것이 실체인지 없다는 생각도 있고, 미친 것과 정상인 것의 구별이 없다는 생각도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에서 매우 철학적인 명제를 말하고 있다. 1부의 성공으로 위작이 나타났고, 세르반테스는 2부의 서문에서 위작에 대해 비난을 하고, 책의 각주에는 위작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있다. 2 말미에는 위작에 등장하는 인물을 돈키호테가 직접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매우 놀랐다. 분명히 소설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 존재를 현실에서 만난다면 돈키호테는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분명히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시공간에서 만난다면 유일한 논리적 해석은 나도 죽었다는 것일 것이다. 돈키호테는 스스로가 소설 인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술방식도 매우 특이하다. 돈키호테의 원작자는 베네헬리라는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한 서술자로서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실제 모험을 아랍어로 것이고, 번역자도 별도로 있고, 세르반테스는 원작을 다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구조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있고, 당시에는 이러한 '의문의 출처' 형식이 자주 사용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로 하여금 서술방식이라는 소설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였다. 서술 관점이 주는 객관성과 전지성의 문제는 나에게는 성가신 문제다. 베네헬리의 존재로 인해 실제로는 3인칭 전지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작가의 전지성은 감추고, 객관성은 부각하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 작가와 캐릭터가 대화하고, 작가 자신도 소설 속에서 거론되고, 캐릭터는 자신이 캐릭터라는 것을 알고, 현실과 허구와 관념의 구별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소설과 현실의 벽도 없다. 독자가 소설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낼 정도이다. 마치 세르반테스가 바로 옆에서 예기하는 듯하고, 돈키호테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기행을 목도하는 듯하다. 소설 돈키호테는 줄거리만 요약하자면 50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실제 정도 분량의 어린이版 혹은 만화版도 있다. 소설에는 분명 줄거리와 표현 외의 뭔가가 있다. 재미나 감동 등의 단어로 쉽게 정리할 없는 뭔가가 있다.

번째 읽은 책은 [백년간의 고독]이었다.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 (magical realism)" 대표인 콜롬비아 작가 마르케스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내게는 팬터지 소설 같았다. 뭔가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 거라 나름 짐작해 보지만, 줄거리에 해당하는 7대에 걸친 가족사는 콜롬비아 혹은 남미의 喜怒哀樂 이라기 보다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 같다. 애초에 마술과 리얼리즘은 상호모순 되는 개념이니 그럴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실은 리얼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모순이 많아 이를 초자연적인 마술이라는 요소를 통해 표현한 것이리라. 문학적 기교이든 문예사조이든 노벨상 수상 작가이니 의도가 있고, 효과적으로 적용했으리라. 하여간 부류는 내게는 아직도 소화되지 않는다. 나의 소화불량과 무관하게 소설 역시 소설은 줄거리와 표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이후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30 읽은 소설들과 비슷했고, 나는 편하게 줄거리와 표현에 집중하며 읽을 있었다. [바람의 그림자] [바다의 성당] 등은 베스트셀러이고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때는 재미있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영화 편을 느낌이었다. 많이 읽히는 소설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감이 잡혔으나, 베스트셀러를 읽는다고 베스트 바이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거미여인의 키스] 마지막 부분을 빼고는 100% 대사로만 이루어진 소설인데, 내용도 재미 있었지만, 서술방식이 독특하다고 느꼈다. 소설에서 사용된 3인칭 객관 관점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조지 오웰의 " 브라더" 소설을 쓰는 느낌이 든다. 실제 소설은 죄수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3인칭 객관 서술방식이 소설과 매우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로버트 볼라뇨의 [2666] 1126쪽에 이르는 매우 소설이다. 소설은 서술방식이 수시로 바뀌는 문학기술도 특이하지만 뚜렷한 주제나 결말이 없다는 점이 가장 특징이다. 영화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런 類로, 주인공 역할의 하비에르 바르뎀의 소름 끼치는 연기와 함께 아무 결말 없이 끝나는 상황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영화 [쇼섕크 탈출] 보면서 영화가 거의 끝나가는 탈출은 없을까 궁금해하다가 거의 마지막에서야 탈출하는 장면을 보면서 축적된 긴장감과 기다림이 탈출을 극적으로, 캐릭터를 선명하게, 주제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을 알았다. 결말이 없으면 주제도 알기 어렵다. 결말의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기에 소설이나 영화가 결말 없이 끝나면 "이게 뭐지?"라는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1990년대 멕시코에서 있었던 여인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대전에 참전한 정체불명의 작가 이야기가 1990년대와 서로 엮이면서 줄거리가 진행된다. 352쪽에 이르는 파트4 111건의 살인사건이 신문기사나 수사기록처럼 건조한 문체로 서술된다. 위키피디아에서 실제 사건에 대한 간결하지만 심도 있는 설명을 찾을 있다.[1] 그러나 소설이 주는 음산한 간접경험은 결코 얻을 없다. 소설의 길이와, 결말 없음과, 전체적인 구성과, 파트4에서 보여주는 고문 같은 반복은 모두 작가의 계산된 의도라는 생각이다. 결말은 없지만 독자 스스로가 뭔가 느낄 밖에 없게 한다. 역설적으로 소설이 어떤 결말을 가진다면 그것을 읽는 순간 장황하다는 느낌을 가질 밖에 없을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성당의 대화] 내게는 [돈키호테] 다음으로 중요한 소설이다. 소설의 가장 특징은 無重複(zero-redundancy) 時空間(spacetime)이다. 無重複은 소설 사건과 인물을 특정할 있지만 전혀 중복이 없다는 의미이다. 時空間은 소설 서술의 전개에 있어서 다수의 시간과 공간이 혼재한다는 의미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 혹은 가역성과는 다른 뜻이지만 묘한 유사성이 있다. 소설은 730쪽으로 상당히 길지만,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 빼거나 바꿀 없는 정도로 매우 정교하다. 소설에는 따옴표(") 개도 없다. 줄표() 있지만 매우 불규칙한 형식으로 사용된다. 話者를 있지만 전혀 중복이 없다. 내용상으로 있으면 話者를 명시하지 않는다. 문법적으로, 性數의 일치, 시제 등으로 話者가 특정될 있다면 話者를 명시하지 않는다. 스페인어 원본인 소설을 스페인어 수준의 性數의 일치나 시제가 없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면, 영어로 번역하는 경우에도 난감한 경우가 많다. 주석이나 괄호로 보완하려면 읽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주석이나 괄호가 필요할 것이다. 단락 내에서 다수의 시간과 공간에서 대화가 나타난다. 심지어 문장 내에서도 다수의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상황파악이 어렵다. 이러한 강요된 주의와 의도된 혼돈은 사건과 인물의 상호연관성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독자가 이를 간접체험 하도록 '강요'한다. 소설과 영화는 많은 기교를 상호 배우고 적용하지만,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왜곡은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전환은 영화의 '플래시백(flashback)' 성격이 있지만 속도는 화면 전환이 너무 빠르고 많아서 토할 정도로 현기증이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중력에 비유하면 시간과 공간이 중력에 의해 모두 왜곡되고 있고 그런 면에서 時空間을 연상하게 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無重複과 時空間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독자의 긴장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했다.

문학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다른 소설가들이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루이스 마틴-산토스, 리카르도 피글리아 등등. 보르헤스의 수학적 개념들, 코르타사르의 매우 실험적인 구성, 마틴-산토스와 피글리아의 난해함 등으로 이들 작가의 작품들은 중도에 포기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해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지난 일년 동안 소설을 읽으며 나는 소설이 단지 줄거리와 표현의 덩어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이상이다.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은 간접체험이다. 간접체험이라는 말은 자체로 모순(oxymoron)이자 역설(paradox)이다. 소설이라는 '간접' 통해 진정한 '체험' 느끼게 하는 것이 소설가의 수준이자 능력이다. 강렬한 예술적 감흥이 전제가 되지만 그것 자체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가 기술자는 아니지만 다양한 문학적 기술을 적절히 활용해야 간접체험이 가능하다. 세르반테스의 독자-작가-캐릭터, 현실-허구, -현실, 미침-이성 사이의 허물기가 없으면 [돈키호테] 그냥 30분짜리 만화영화다. 볼라뇨의 과감한 구상이 없으면 전쟁과 범죄의 음험함이 '체험' 없다. 바르가스 요사가 심지어 문법까지 제약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언제 페루는 됐는가?"라는 한탄을 공감할 없을 것이다. "간접체험". 짧고 순진해 보이는 단어를 나름 진정으로 이해하는데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1 반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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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것들:
세르반테스는 코페르니쿠스, 바르가스 요사는 아인쉬타인.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고, 아메리카에는 바르가스 요사가 있다.
바르가스 요사는 어학과 문학이 불가분임을 증명했다.
번역은  고통스럽다.
자유도(degree of freedom) 적을수록 창의성은 빛난다.
현대성은 시간순이 아니다.




[1] Wikipedia, Female homicides in Ciudad Juárez,  https://en.wikipedia.org/wiki/Female_homicides_in_Ciudad_Ju%C3%A1r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