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6
이 책은 볼라뇨 사망 1년 후인 2004년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원래 (경제적인 이유로) 5권 연작으로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문학적 이유로) 5 파트로 구성된 단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결말이 없다는 것이다. 결말 없는 소설은 아마도 처음 읽은 것 같다. 영화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를 통해 결말 없는 스토리 형식을 접한 적이 있다. 이 영화를 통해 특히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의 소름 끼치는 연기, 캐릭터의 안정성, 역동적인 스토리 전개 등이 '있다면' 결말은 '없어도'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처음 느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 '이게 뭐지?', '그래서 뭘 말하려는 거지?' 등의 일종의 아쉬움과 허탈감은 남았다. 이 소설 역시 1,100 쪽이 넘는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는 순간 순간은 재미 있고, 몰입이 된다. 영화는 끝나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정작 끝날 때까지 결말을 기대하게 하지만, 책은 전체 분량도 보이고, 맨 뒤로 건너 뛰어 엿볼 수도 있기에 대략 중간 정도 읽다 보면 결말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말이 없는 소설의 문제라면 문제가 작가가 주제를 분명히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다른 참고 문헌을 살펴봐도 주제가 분명하지 않다.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읽어내기도 어렵다. 이 책은 저자가 肝不全으로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쓴 것이라 미완성도 아니고 연작을 구상한 것도 아니다. 결국 재미, 감동, 해석 모두 독자에게 맡기려는 의도가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정체불명의 작가 아르침볼디(Benno von Archimboldi, 1920-)의 일생과 멕시코 산타 테레사에서 발생한 여인 연쇄살인 사건(1993-1997)이다 (실제 시우닫 후아레스에서 있었던 사건, 1993-2005년 사이 370명 이상의 여성 살해). 아르침볼디의 일생은 파트 5이고, 2차대전 당시의 상황이 나온다. 흔히 보는 전쟁의 참화 같은 것은 거의 없고, 전쟁이 남기는 감정과 정신의 황폐가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연쇄살인은 파트 4이며, 111건의 사건을 마치 경찰의 수사 기록을 보여주듯 서술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연쇄살인의 사회적 배경도 심도 있게 알리고 있다. 이 두 파트가 일종의 메인이라 할 수 있고 분량으로도 680쪽, 61%에 이른다.
파트 1은 아르침볼디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4명의 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여자 한명과 남자 3명인 이들은 기묘한 관계를 유지한다. 두 남자와 성적 관계를 유지하고 두 남자는 서로 그런 사실을 알고 묵인한다. 두 남자와의 관계는 반복적으로 교대되다가 어느 날 이른바 쓰리섬을 한 이후 관계는 소원해지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살게된다. 파트 2는 아말피타노라는 철학자의 이야기로 파트 1에 나온 학자 중 3명이 아르침볼디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멕시코로 왔을 때 현지 도우미 역할로 파트 1에서 처음 등장한다. 파트 2는 아말피타노의 광기와 기묘한 가족관계가 주된 이야기 이다. 파트 3은 파테라는 미국 기자가 멕시코에 취재차 왔다 겪는 이야기로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폭력과 공포, 그로부터의 탈출이 주된 줄거리이다. 파트 2와 3은 완전히 제거하더라도 전체 소설의 줄거리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파트 1은 파트 4와 5에 대한 소개의 의미로 약간의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파트 1이 없다면 파트 4와 5는 한편의 소설로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스토리 전개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파트 2와 3은 불필요 하지만, 이들 역시 제거된다면 소설 전체의 일종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어차피 이 소설은 결말이 없기에 스토리 전개가 큰 의미가 없고, 5개 파트가 독자의 감정흐름에 있어 묘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어 결국 5 파트 1 권 구성이 전체적인 통일감을 주고 있다.
이 소설에는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고 하나하나가 별개의 단편소설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자체완결성이 있고 심오한 면이 있다. 훗날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면 이 소설 전체보다는 문득문득 이들 짧은 이야기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볼라뇨의 문체는 매우 세밀하다.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사진과 같은 공간적 상황을, 비디오 같은 시간적 행위를 서술하는데, 때로는 그러한 상세함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볼라뇨는 역설적인 그러나 화려하거나 현학적이지 않은 매우 현실적 표현을 자주 썼다: "살아있는 시체[2]", "자발적 고아[3]", "침묵의 발성[4]", "우리는 과거로 둘러싸여 있다[5]", "분별력은 돈[6]" 등. 볼라뇨의 성적 표현은 매우 건조하다. 앞서의 쓰리섬 상황도 "그녀(Norton)는 둘과 성교했다[7]" 정도이다.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 "정액과 질액으로 번질거리는 자지[8]" 정도이다. 그러나 성행위의 상황과 성행위자들의 심리상태는 파격적이다. 볼라뇨의 문체나 표현은 눈에 탁 띄도록 "멋지다" 감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섬칫한' 느낌이 스멀스멀 들게 한다.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소설 [살라미아의 병사들[9]]에서 세르카스가 볼라뇨를 만난다. 이 소설은 소설이긴 하지만 세르카스가 언론인 출신인 관계로 다큐멘터리 성격을 띄고 있다. 세르카스의 소설에 나타난 볼라뇨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차분하며 주의 깊은 인물로 나타난다. [살라미아의 병사들]에서 볼라료가 세르카스에게 말하길, "소설을 쓰기 위해서 상상력이 필요하진 않다. 단지 기억. 소설은 회상의 조합으로 씌여진다."[10]
이러한 사실주의적 관점 때문에 [2666]이 결말이 없는 것은 아닐까? 결말을 갖고 쓴다면 작가의 가치관이 개입되고 사건은 윤색되고, 캐릭터는 과장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볼라뇨가 2001년 [2666] 집필 중 인터뷰에서 한 말: "2666은 잔혹한 소설로 이미 쇠약한 내 건강을 완전히 망칠 수 있다."[11]
사실 내지는 현실은 이 책이 서술하듯 잔혹하다. 작가가 가치관을 개입시키고, 그에 따라 결론을 만든다면, 아마도 내용이나 스토리는 더 잔혹해도 작가 스스로가 상처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작가의 가치관이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이라면 결말은 결국 작가가 원하는 대로, 작가의 마음의 평화가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쓸 수 있을 것이다. 결말이 없다면 독자는 답답할 정도이겠으나, 작가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고 잔혹이든 환희이든 심적 부담 혹은 고통이 없을 밋밋한 스토리를 가지고는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스토리를 제시하면서 선악 판단이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면, 위의 볼레뇨의 말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도 다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다면 결말 없는 소설의 아쉬움 혹은 허탈감을 넘어 작가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2666]은, 2차대전과 연쇄살인이라는 큰 줄기 속에 포함된 모든 사건과 상황, 명시적 묵시적 서술과 표현 등은 충분히, 그리고 매우 효과적으로 암울하다. 독자가 느끼는 (결말 없음에 대한) 담답함, 황당함은 볼라뇨의 고통, 좌절 등에 대한 공감이자 존경이 될 것이다.
끝.
[9] Javier Cercas, Soldados
de Salamina, 2001, Ernst Klett Sprachem GmbH edition, 2009, Stuttgart,
Germany